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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한리 Chae Hanlee Apr 13. 2024

지고지선에 대하여

__<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읽기 56

지고지선에 대하여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읽기’를 쓰면서 여러 번 암초에 부딪혔었다.  그리고 암초에 부딪혔다는 사실을 "에이 뭐 그냥 글인데" 라는 일종의 자기만족으로 그때그때 피해 갔었다.  그래서 56회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번 암초는 그냥 피해 가기가 좀 어려웠다. 니체의 이 부분은 <처세에 관한 글> 혹은 <세상살이를 위한 책략에 대하여>라고 제목이 붙어있다.  이어지는 글은 <더없이 고요한 시간>이라고 제목이 붙어있다.  10여 년 전에 그리고 이번에도 여러 번 읽었지만, 어떤 응집력 있는 생각을 찾아내지 못했다.  갑자기 니체가 우리에게 처세술을 가르쳐줄 리도 없고. 니체가 헤매고 있는 것인가?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니체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선입견 비슷한 것에 맞춰 보기로 했다.  암초를 인정한 것 외에 발전이 없지만 그래도 계속 써야 할 것 같다.  아무튼 눈길을 끄는 몇 개의 단어__허영심, 긍지, 겸손, 지고지선__을 가지고 니체의 속심을 넘겨짚으면서 써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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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지고지선 (至高至善)의 관점에 입각하여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최고의 선을 행동의 목표로 삼고 나름대로 올곧게 살아간다.  그런데, 니체는 이런 지고지선을 고집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한탄한다.  


“아아! 나는 이같이 지고지선의 인간들에게 지쳤다.  나는 일찍이 이들 지고지선한 사람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았다.” (1) 


아무리 지고지선으로 통한다고 해도, 선악의 모든 관점은 니체가 보기에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생활의 기준으로서 오랫동안 자리매김 한 것이다.  공동체 특유의 가치체계가 형성되어 있으며,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 가치체계의 가장 상위에 있는 가치를 지고지선으로 받아들이고 수동적으로 적응하면서 아무런 의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일견 편리하다.  복잡하게 옳고 그르고를 새삼 따질 일들이 퍽이나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편, 니체가 위에서 말한 지고지선한 사람들의 ‘벌거벗은 모습’이란 공동체의 습속에 얽매인 사람들의 비겁하고 부자유한 모습이다.  그들은 습속에 얽매여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만큼은 절대적인 선(善)에 따라 모범적으로 흠잡힐 바 없이 잘 살고 있다는 ‘허영심’을 지니고 있으며, 이 허영심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자기 자신과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을 위선이라는 의식도 없이 대하는데, 니체는 이들이 이 가면을 벗었을 때 드러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 벌거벗은 모습은 그야말로 자립적인 생각이란 조금도 하지 못하는 헐벗고 허약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만일 이렇게 허영심으로 삶을 영위해 온 인간이 자신의 삶을 지탱해 온 습속의 가치체계가 몰락하는 것을 목격하면, 그는 삶의 방향을 잃고 비탄에 빠지게 되며, 자기 삶을 되돌아보면서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 빠진다.   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들은 쉽사리 현실을 부정하고 새로운 신을 찾아 헤맨다.  


한편, 드물기는 하지만, 주어진 가치체계를 절대적인 것으로서 진심으로 믿고 따르면서 깊은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긍지’의 인간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순수하고 거짓이 없어서 자신이 절대적인 것으로서 지금까지 믿고 따르던 선악의 잣대가 실제로는 자의적이고 상대적인 것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면, 이 깨달음의 순간에 그들은 자기 자신의 신념이 틀렸다는 것 역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들은 허영심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이 믿었던 가치체계와 결부된 공동체의 물질적, 사회적인 이해관계로부터 애당초 자유롭다.  이 사람들이 그때까지 지고지선이라 믿었던 가치체계를 따르면서 품었던 만족감은 ‘긍지’였는데, 이제는 그들의 긍지가 상처를 입은 것이 그들을 새로운 국면에 서게 할 뿐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니체는 기뻐하며 이렇게 말한다: 


“긍지가 상처를 입었을 때, 거기에는 긍지보다 더 훌륭한 것이 발생한다.” (2) 


'긍지보다 더 훌륭한 것’으로서 발생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삶에의 수동적인 ‘적응’이 아니라,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를 인정하며, 자기 삶의 본질을 이루어 온 ‘의지’, ‘자기가 지금까지 맹목적으로 걸어온 길’에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가치체계가 이미 붕괴되고 전도되었음을 선포하려는 의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니체는 여기서 긍지의 사람들에게 한 가지 경고를 보낸다.  즉, 그는 불필요한 겸손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3)   겸손한 사람은 대개가 자기보다 더 뛰어난 자가 나타나 무너진 가치체계와 지고지선의 가치를 대신할 진리를 가르쳐 주기를 고대할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에게 가치체계의 전도(顚倒)를 부추길 경우 “네 앞 가름이나 잘하라”는 비아냥을 들을까 두려워할 것이다. (4)  이런 사람들에게 니체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의 일신(一身)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의 말을 토해라!  그리고 파멸하라! 사람들의 조롱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는 복종이란 것을 잊은 인간이 아닌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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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64

(2)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162

(3)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 47, p. 165 참조.  여기서 마치 겸손을 버리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같지만, 나는 자기 의지를 따르는 모든 이에게 하는 조언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4)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p. 165-166

(5)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pp. 165-166 이 글은 짜라투스트라가 ‘성난 여주인’이라고 부른 ‘더없이 고요한 시간’이 가치전도의 사실을 선포하는 것을 주저하는 짜라투스트라에게 한 말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스스로가 진실을 알고, 그 진실을 말해야 함을 알면서도 자신이 여전히 주저하는 것을 느끼며, 좀 더 ‘성숙해지기 위해’ 다시 적막 속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2부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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