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보다 생존이 먼저다.
병가와 함께, 나는 하나의 제안서를 남겼다. 단순한 치료 목적의 병가가 아니라 조직 내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구조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개선점을 정리했다. 말이 아닌 문서로, 감정이 아닌 구조로, 내가 이 조직에서 겪은 불합리함을 조용히 짚어냈다. 그 제안은 조용히 읽히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묻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트레스 요인을 제공했던 그 당사자는 기대대로, 아주 익숙한 방식으로 반응했을 확률이 5469385%.
자신의 세계 안에서 자신이 제일 옳고, 스스로 생존을 위해 터득해 온 방식으로 상황을 포장하고, 사실과 감정을 흐리고, 여론을 본인에게 유리하게 만들려는 움직임.
나는 안다. 확실히 안다. 그 사람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봤고 직접 부딪혀봤으니까. 이쯤 되면 거의 자연의 법칙이다.
파장이 일었을 것이다. 예전 같았으면 나도 어김없이 눈치를 보고 불안해서 잠을 뒤척였을 것이다. 누가 무슨 말을 하나, 어떤 오해가 돌고 있는지, 내 자리를 위협받지는 않을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내 안위를 최우선에 두기로 했다. 내 정신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누군가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려는 시도는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붙잡고 있어 봤자 나만 더 상한다는 걸, 이제는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발리행 티켓을 끊었다. 이미 다섯 번째지만 이번엔 처음으로 혼자다. 많은 여행지를 가봤지만 발리만큼 나에게 평온함과 기쁨을 주는 곳은 없었다. 이번만큼은 ‘도망’이 아니라 ‘도착’을 택했다. 내가 선택한 장소로 내가 나를 데려다주는 나만의 여행.
철저히 나만을 위한 선택이었다. 물론 안다. 발리에 간다고 모든 게 해결되진 않는다는 걸. 잠깐 떠난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바뀌는 건 아니다.
하지만 거기서만은 내 마음을 다치게 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과 그 누구도 눈치를 주거나, 평가하거나, 감정을 뒤틀지 않는다는 사실 그 두 가지 생각만으로도 묘하게 설레었다. 이 평온함 하나면 지금은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젠 나를 위한 것만 생각해 보기로 했다. 회사도, 사람도, 오해도, 소문도 내려두고 파도 소리, 바람, 햇빛의 온도 같은 것들을 중심에 두기로 했다. 내가 어떤 종류의 음악을 좋아하는지, 보드카(vodka)와 진(gin) 중 무엇이 내 취향에 맞는지,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떤 감정이 드는지, 어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이제 조금씩 알아가려고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은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다. 지금의 내가 나를 아껴줘야 5년 뒤, 10년 뒤의 나도 귀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는 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걸 깨달은 지금 이 순간, 나는 조금은 덜 외롭고, 조금은 괜찮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