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이 있던 게 아니었다. 그냥 좋았다.
‘좋은데..?’
일하는 곳을 집 근처로 바꾸고 출퇴근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 초등, 중등 수학만 가르치다 보니 수업도 7-8시 정도면 끝이 났다. 12시쯤부터 출근했으니, 오전시간도 꽤 여유로웠다. 아침과 저녁을 내 시간으로 쓸 수 있다는 생각에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과자를 제대로 만들고 싶다.’
캐나다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몸이 아파 돌아왔을 때 작은 광파오븐을 샀다. 전자레인지, 오븐, 그릴 다 되는 그 당시 20만 원 정도 했던 내 생애 첫 오븐이었다. 누워있지 않고 집안에서도 조금씩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어머니랑 함께 어설프지만 집에서 빵을 구워내곤 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자취를 하면서 자취방으로 옮겨진 오븐은 전자레인지의 역할로 바뀌었다. 마음속에서는 과자 만들고 싶은데 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자취방에서 뭘 할 수 있었을까. 끼니나 잘 챙겨 먹으면 다행이었다.
자취를 한 지 6개월 후, 아버지가 안 계신 집이 외로우셨던 어머니는 결국 대전에서 내가 근무하고 있는 용인으로 올라오셨다. 나 역시 어머니랑 함께 살 수 있는 게 좋았고 전자레인지 역할을 하던 오븐은 다시 집으로 옮겨져 오븐으로 사용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에는 유튜브도 없고 책도 거의 없던 상황이라 어디서부터 뭘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아주 가끔 학교 방학 때 밀가루를 넣지 않고 떡처럼 구워버린 브라우니라던지 계란찜 같은 카스텔라를 만들 뿐이었다.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가끔씩 나는 넋두리처럼 동료선생님과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곤 했으니 내심 내 마음속에는 계속 베이킹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나 보다.
“나중에… 카페 할까 봐요.”
실제로 할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다. 누구나가 로망처럼 가지고 있듯 나 역시 그저 하나의 로망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학교를 그만두면, 무엇을 할까.
집에서 베이킹을 해보고 싶었다.
캐나다에서 캐런네 집에서 느꼈던 그 따뜻함을 다시 한번 한국에서 느끼고 싶었달까.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 후 방배동의 학원으로 옮기면서 일주일에 4일 정도는 여유가 생기자 나는 그 당시 베이킹을 배울 수 있는 문화센터를 먼저 찾았다. 단순히 취미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 하나였다. 엉망인 티라미수를 만들어 가져와 어머니에게 보여주는 게 좋았고, 황남빵을, 단팥빵을, 타르트를 만드는 게 좋았다. 이때 받은 소중한 레시피는 파일에 고이고이 꽂아 두었고, 이때 만난 선생님을 쫓아다니며 베이킹을 가르쳐달라 했다.
용인 처인구의 시골 어느 동네에 있던 선생님의 공방은 너무나 아늑했다. 선생님은 예쁜 앞치마를 메고 투박하지만 정겨운 시골부엌 한편에서 사람들과 함께 빵을 굽고, 나눠먹고, 따뜻한 차를 내리는 분이었다. 그곳에서 발효빵을 배웠다. 천연발효종 르뱅을 사용해서 바게트를 굽고, 치아바타를 구웠다. 이곳에서 나는 이론을 배우기보다 공방에서 빵을 나누는 정서를 배웠다.
‘좋다.’
베이킹을 한다는 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구나. 나도 나중에 공방이 갖고 싶었다. 그 공방에서 빵을 굽고, 사람들과 나누고, 소통하고 싶었다.
조금 더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계속해서 갈증이 났다. 지금은 레시피를 보고 따라 흉내내기만 할 뿐, 좀 더 체계적인 이론들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 학원에 출근하지 않는 날이면 계속해서 다른 원데이 클래스를 찾아다녔다. 투박하게 베이킹을 문화센터선생님을 통해 배웠다면 이제는 좀 더 정교하게 배우고 싶었다.
마침 우리나라에 르꼬르동과 나카무라를 졸업한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나면서 원데이 클래스가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학원을 다니며 받은 100만 원 남짓의 돈을 쪼개 20만 원 30만 원의 베이킹 클래스를 들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정말 다양하게 들었다.
케이크. 타르트. 앙금떡케이크.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가서 배웠다. 그렇게 배운 디저트는 꼭 한 번씩 집에서 다시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과자들은 꼭 교회에 가져가서 다 같이 나눠먹었다.
방배동 학원을 그만두고 집 근처 학원으로 옮겨 오전과 저녁시간이 생기자 조금 더 제대로 베이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남편은 처음에 카페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일했던 곳은 카작이라는 곳이었는데 교회에서 하는 카페 라기보다 정말 카페인데 일요일에 교회로 바뀌는 곳이었다. 처음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이곳은 캡슐커피와 간단한 샌드위치를 하고 있었다. 그 역시 처음엔 커피에 대한 흥미를 크게 느끼던 건 아니었다. 그저 주어진 일을 하고, 일요일에는 교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전도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이제 막 집 근처 학원으로 옮겼을 즈음.
카작이 전체 리모델링을 하기 시작하면서 커피, 브런치, 디저트에 집중된 형태로 바뀌기 시작했다. 커피 전문업체를 끼고 리모델링이 시작되자 캡슐커피에서 원두커피와 머신으로 전부 교체되었다. 그리고 직원들 모두 커피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이때, 그는 커피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날 엄청 상기된 표정으로 집에 왔다.
“너무 재밌어!”
“그래? 어떤 게 재밌어?”
“원두를 어떻게 가는지, 추출을 어떻게 하는지, 이 모든 게 다 너무 과학적이라서 내가 어떻게 맞추는지에 따라 커피 맛이 바뀌잖아!”
카페가 리뉴얼되는 기간 동안 그는 부지런히 교육을 들었고 오픈하고 나서 거의 주 7일을 계속 카페에 있으면서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라인더 청소를 해보려고 해!”
밤 10시. 마감을 하고 전화가 왔다.
“그래..? 얼마나 걸리는데?”
“한 시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이미 밤 10시였는데 11시에 올 거라니. 슬슬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남편에게 조금 심통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집중해야 하는 것도 알고, 무엇보다 스스로 너무 신나 하는 남편을 보는데 어떻게 말릴 수 있었을까.
“그래.. 조심히 하고 와.”
그렇게 나는 잠들었다.
새벽 2시. 잠에서 깨서 옆을 봤는데, 그가 없었다.
“여보 어디 갔어?”
불러도 감감무소식.
순간 불안이 찾아왔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여보.. 나 지금 아직 카페야. “
“왜 아직도 거기 있어!!”
“그라인더가… 작동이 안 돼.. 나 조금만 더 해볼게. “
그게 왜 작동이 안 될까!! 또다시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새벽 3시.
“아직 멀었어?”
“진짜 거의 다 되어가 정말…!!”
그날 거의 4시가까이 집에 들어왔다.
6시간 동안 그라인더와 사투를 벌였던 그는 결국 그라인더를 작동시켰고, 우리는 이때부터 그라인더 청소를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 번 열면 시간을 너무 많이 뻈겨 버렸으니까!
(그래선지 지금도 그라인더 열 때면 조금 무섭다.)
엎치락뒤치락 사건도 많고 사고도 많았지만 그는 열심히 커피를 배웠고, 나 역시 취미로 하는 베이킹에 흥미를 붙이고 있었다.
집 근처 학원으로 옮기면서 오전, 저녁 시간 여유가 생기자 과자를 제대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취미로 하는 거… 잘 만들고 싶은걸.’
잘 만들려면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도 기회가 있어야 만들 수 있지. 그렇다면 그 기회를 스스로 조금씩 만들어 보기로 했다.
남편이 일하는 카페 사장님이자 우리 교회 목사님께 말했다.
“목사님. 저 혹시 여기에 제가 만든 쿠키를 둬도 될까요?”
돈을 벌려는 목적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내가 만든 걸 누군가 먹어줬으면 싶었다. 흔쾌히 허락해 주신 목사님 덕분에 나는 이때 나만의 첫 쿠키 레시피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