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 투석 마지막날이 되어서야 깨닫는
이대로 좋아지지 않는다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그날 저녁부터
엄마와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봤었다. 엄마는 아빠의 마지막이 다가온다면 집에서 편안하게 마지막을 준비하도록 해주고 싶다고 했지만 아빠의 상태를 봤을 때 병원에서 절대 퇴원을 시켜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쯤 나는 밤이 되면 어떠한 결과를 들어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하면서도 오전 9시만 되면 일말의 희망을 놓지 못하는 아수라백작 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투석 마지막날도 그랬다. 엄마와 호스피스 병동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이 무색하게 드디어 무섭게 치솟던 간 수치가 조금 내려가 투석을 하루 더 돌려보자는 전화가 내 머릿속을 다시 한번 꽃밭으로 만들어놨었다.
이 기쁜 소식을 아빠도 들었을까, 면회를 가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가벼웠다.
저 멀리 하얀 박스 같은 멸균실 안에 평소와는 조금 다른 아빠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보니 머리와 발에 하고 있던 붕대가 풀러 져 있었다. 붕대를 감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치료를 위해 민 머리가 딱지와 굳은살로 얼룩덜룩했다. 황달로 인해 피부 전체가 샛노랬어서 아빠의 머리만 놓고 보면 털이 숭숭 난 멍든 황도 같았다.
"아빠! 붕대 풀었네!"
눈을 감고 있는 아빠를 깨우려 부러 큰 소리를 내며 딸이 왔음을 알렸다. 아빠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아빠 들었어? 오늘 간 수치가 조금 내려갔대. 그래서 투석 한번 더 돌리기로 했어, 너무 다행이지!"
그때의 난 기쁜 감정에 취해 아빠의 상태를 자세히 볼 생각을 못했다.
조잘조잘 이야기를 할 동안 눈을 감고 있는 아빠에게서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상해서 고개를 침대 쪽으로 내리자 그제서야 온 힘을 숨 쉬는데 쓰고 있는 아빠가 내 눈에 들어왔다.
"딸. 아빠 너무 힘들어"
한참 숨을 고르다가 어렵사리 입을 뗀 아빠의 첫마디였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기침과 피가 나 피가 역류해 투석기에서 소리가 났다. 어쩜 그렇게 자기 생각만 할 수 있는지 아빠의 상태도 모르고 감정에 취해있던 내가 미웠다. 그리고 나도 처음으로 내가 내 욕심 때문에 아빠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빠가 원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순전히 내 욕심으로 지금까지 끌고 온건 아닐까. 혹시 이제 다 그만하자고 말해주길 원하는 거면 어쩌지.
힘내라는 말도
이겨내자는 말도
소용이 있는 걸까
아빠한테는 그 모든 말들이 그저 짐이었으면 어떡하지.
"그래? 너무 힘들지..." 한마디를 하며 아빠의 손을 잡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게, 내가 불안해하는 걸 들키지 않게, 서로를 위해서 주변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아빠가 집중해서 듣지? 아픔을 잠시 망각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오늘 날이 춥다길래 가죽 재킷을 입어볼까 했는데 낮에 너무 더워서 포기했어. 다음에 좀 더 추워지면 입고 올게. 아빠가 그 재킷 입은 거 예쁘다고 했었는데."
"지운이 면접 보러 간다고 했던 거 기억나? 그게 어제였는데 긴장해서 헛소리만 하다가 왔대. 정말 망했다고 그러던데 면회 오면 다시 물어보자."
"엄마랑 지운이랑 양치하다가 우리 가족 중에 아빠 이가 제일 안 좋은데 너무 오래 안닦아서 삭는 거 아니냐고 막 웃었다? 아빠도 그건 좀 걱정되지 않아? 그치?"
그냥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그냥 힘내라고 했다.
그것밖에 못하는 내가 너무 밉지만 그만하자는 말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한참을 생각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청소기를 돌리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오늘 아빠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조건을 구하고 싶지만 이런 아주 지극히 개인적이고 민감한 주제를 누구에게 물어본단 말인가.
물어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난감할게 뻔했다.
결국 저녁을 먹다 엄마에게 물이 잔뜩 든 양동이를 한 번에 쏟아내는 것처럼 꾹꾹 눌러왔던 고민을 한 번에 쏟아내 버렸다.
"엄마 있잖아. 오늘 아빠가 힘들다고 했어. 혹시 이제 그만하고 싶은 거면 어쩌지. 우리가 아빠한테는 한 번도 안 물어봤잖아. 이제 전화가 오면 계속해달라고 하는 게 맞는 건지 별 다른 효과가 없으면 그만하자고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 근데 또 내가 내 입으로 투석 그만둬달라는 말도 못 하겠어. 선생님이 하자고 하는 건 뭔가 효과가 있으니까 하자고 하시는 거겠지? 그냥 내일도 의사 선생님이 해보자고 했으면 좋겠는데 그만하자고 하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한번 더 해달라고 할까? 안된다고 하면? 다른 건? 아빠가 좋아지고 있긴 한 거겠지?"
나는 마음의 준비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솔직히 이쯤 됐으면 누가 꿈이라고 해줄 법도 한데 그래도 나는 내일 전화가 오면 또 하루 더 돌려달라고 하겠지 내일도 꼭 전화가 왔으면 좋겠다.
나의 고민을 비웃듯 다음날 아침 중환자실에선 전화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