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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더하기 Jan 25. 2022

뻔함에 대한 책임

사실 다음 주가 설이라 갈까 말까 망설였다. 분명 대화 주제는 뻔할 것이다.

 1. 허리가 여전히 아프다.
 2. 시골집이라 사는 게 불편해도 어찌 할 방법이 없다.
 3. 임대 놓은 밭 계약이 매끄럽지 않다.
 4. 늙으면 죽어야 한다

항상 4번에서 끝을 맺는다.

'늙으면 죽어야 한다.'

나의 주말을 친정 부모님과 위와 같은 대화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일주일만 지나면 다시 가서 들어야 하는 너무 뻔한 내용들 아닌가?

이번 주 토요일에 인사드리러 가자는 남편에게 설날 가자고 미뤘지만 일요일 아침 그냥 가 보는 게 어떠냐고 다시 물었다. 그러면 집에 있지 말고 보령 해저터널이나 구경시켜드리러 가자고 하고 나섰다.

부모님은 우리가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준비를 하고 계셨다. 아버지는 감색 체크무늬 베레모까지 한껏 멋을 내고 나오셨다.

"터널 그거 뭐 볼 거 있다니?"
"하긴 노인정에서도 우리만 안 가봤지. 다 가봤더라. 궁금했는데 잘됐다."

엄마는 자문자답 하시면서 언제 허리가 아팠냐는 듯이 가볍게 차에 올라 머플러를 풀어 가방에 넣으셨다.

그렇게 떠난 보령 해저터널 구경.

태안 안면도를 거쳐 원산안면대교를 건너는 동안 예상범위에 있던 뻔한 대화 주제는 나열되지 않았다.

"우리 애들 와서 대천으로 가고 있어."

간간히 걸려오는 노인정 고스톱 멤버들의 참석여부를 물어보는 전화에 간단하게 통화를 마무리하셨다. 이 대답에는 "오늘 드디어 당신들이 그렇게 자녀들이 데려갔다고 으쓱대며 얘기하던 보령 해저터널 구경을 가니, 고스톱은 당신들끼리 치게나."가 내포되어있었다.     

해저터널을 가는 동안 이런저런 정보들을 공유했다. 전국에서 가장 긴 터널이면서 세계에서는 5번째로 긴 터널이다. 보령 대천항에서 태안 안면도 영목항까지 20분이면 된다 등.

설명하는 동안 두 분은 해저터널 안으로 들어가자 내비게이션 지도에 나오는 바닷속 도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80이 넘어서 대천해수욕장을 다 와 보네."

아버지의 혼잣말은 차 안 훈기에 가라앉았다 이내 차창밖으로 흩어졌다.

"두 분이 여행 잘 다니셨잖아요. 그런데 왜 대천해수욕장은 처음이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고, 이제 어디를 다녀올까 해도 장거리 운전은 어려워서 다니지 못한다고 하셨다.

부모님은 아버지가 퇴직을 하시고 함께 가까운 해외로 지인분들과 패키지여행도 종종 다니셨다. 이곳저곳 꽃구경, 단풍 구경도 다니셔서 대천해수욕장은 당연히 몇 번 다녀오셨겠지 생각하던 나에게 '처음'이라는 얘기에 놀랐다.

"오래 살아 안죽으니 이런데도 와보네 오래 살아야겠네."

 차에서 잠깐 내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두 분은 이런데 데리고 와줘서 좋다고 연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갈매기 따라 멀리 날아가고 싶을 정도로 민망했다.'늙으면 죽어야 한다.' 같은 으르장으로 마무리 되었던 재미없는 얘기들은 할 이야기가 없어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핸드폰에만 간직하지 말고 사진을 현상하고 액자에 넣어 선날에 가지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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