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아픈 사람

한줄기 햇빛으로도 위로받았던

by 내사랑예봄아

작년 1월쯤이었다. 어린 시절의 결핍을 떠올리다 문득 남편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엄마 없이 자라야 했던 그의 이야기를 다시 듣고 싶었다. 이제는 조금 더 성숙해진 마음으로 그를 보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은 그 시절의 희미한 기억을 글로 적어 메일로 보내주었다.


〔나는 여섯 살부터 열 살까지, 엄마 없이 아빠와 두 형과 살았다. 아빠는 외박이 잦았고 큰형은 자주 집을 비웠다. 작은형은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바빴다. 그래서 나는 혼자 있는 날이 많았다.


배가 고팠는지, 어디가 아팠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몽롱한 채로 집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햇살은 따뜻했다. 그렇게 앉아 있는데, 문득 하늘에서 툭 떨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지?’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다.


어느 날, 어둠이 내리자 배가 고팠다. 비름나물을 요리해 먹고 싶어 집 밖 경사진 곳으로 나갔다. 어린 잎만 골라 데쳤지만 너무 삶아 곤죽이 되고 말았다. 꾸역꾸역 삼켰지만 결국 맛이 없어 버렸다.


나는 친구들과도 쉽게 어울리지 못했다.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놀았지만,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 바라보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떻게 내 어린 시절과 이렇게 닮았을까. 다른 곳, 다른 시간에 있었지만 우리는 집에 홀로 남겨진 아픔을 아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남편에게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참 잘했어요.”라고 말했다.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 아이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남편의 내면 아이를 위로하고 싶었다. 남편의 여덟 살 무렵 사진을 찾아 현수막 제작 업체에 의뢰했다. 사진 옆에는 ‘참 잘했어요’를 크게 새기고, ‘참잘했어요 별 도장’ 다섯 개도 넣었다. 그리고 수시로 볼 수 있도록 거실 한가운데 걸었다.


무슨 놀이를 하고 싶냐고 묻자, 남편은 구슬치기, 딱지치기, 소꿉놀이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번데기도 먹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놀이 계획을 세워 매주 토요일마다 주제를 정해 아이처럼 놀았다.


남편은 어릴 적 옆집 누나와 잠깐 놀던 기억이 좋았다고 했다. 나는 자진해서 누나 역할을 맡았다. 남편이 잘할 때마다 “우와, 진짜 잘한다!”라며 엄지를 들어 올리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놀이에 몰두했다. 그 순간 남편은 영락없는 여덟 살짜리 아이였고, 나는 그런 동생을 다정히 챙기는 누나였다. 신나게 웃는 사이, 목울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현수막은 1년 넘게 그 자리에 걸려 있다. 남편은 한동안 아침마다 그 아이에게 “오늘도 잘 부탁한다”고 인사했다고 한다. 얼마 전 내가 “그 아이가 지금 뭐라고 할 것 같아?”라고 묻자 남편은 “고마워요, 나를 기억해 줘서요”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코끝이 시큰해졌다.


“내가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이라고 묻자 남편은

잠시 침묵하다 조용히 말했다.

“견뎌주고, 잘 살아줘서 고마워.” 남편의 목소리는 작게 떨리고 있었다.


남편은 나와 놀던 시간을 회상하며 마치 어린 시절 아이들과 함께 노는 기분이었고 텅 빈 가슴이 채워지는 기분도 들었다고 했다.


불현듯 나는 마음속으로 장면을 그렸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편은 이이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아이들은 남편을 기다렸다는 듯 반가워하며 함께 뛰논다. 그러다 남편이 뒤를 돌아 나를 보며 씨익 웃는다. 마치 고맙다는 듯이.


나 역시 어린 시절 아이들과 놀아본 기억은 별로 없다. 남편과 놀기 전에는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면 그 속으로 들어가 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놀지 못한 상처가 있었기에 남편의 결핍을 보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함께 놀고 나니 더 이상 어린아이처럼 놀고 싶은 마음은 사라졌다.


남편과 놀이를 하며 내 안의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하고 돕는 일은 소모가 아니라, 서로를 치유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평생 바라던 치유의 완성으로 가는 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시멘트 벽에 기대어 한 줄기 햇빛으로 위로받던 그 아이가, 내 마음에 스며들어 나를 일깨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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