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빗장을 열며
열 살쯤이었다. 신정이 지난 어느 날 아빠는 친척 언니가 입다 작아진 한복을 가져오셨다. 처음 입어보는 한복이라 마음이 설레었지만 아빠는 어떻게 입혀야 할지 몰라 한참을 우왕좌왕하셨다. 고름을 아무리 이리저리 매어도 제대로 잡히지 않아 결국 삐딱하게 내려앉은 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시무룩해졌지만 고운 한복을 보니 마음이 괜찮아졌다. 다 입고 나자 아빠는 예쁘다며 씩 웃으셨다.
얼마 후 아빠는 나를 데리고 가평 친척집으로 향하셨다. 하얀 눈으로 덮인 논밭 길을 걸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아빠는 긴 논두렁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으셨고 나는 그 뒤를 뛰다시피 따라갔다. 찬바람이 치마 안을 파고들어 몸을 움츠리게 했지만 한복을 보면 자꾸 미소가 지어졌다.
날이 어둑해져 친척집에 도착했을 무렵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져 나도 모르게 한복 위로 토하고 말았다. 아주머니가 급히 한복을 벗겨 주셨고 나는 내복차림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몸은 춥고 덥고 덜덜 떨렸다. 아주머니가 왜 이렇게 옷을 얇게 입었냐고 하셨던 것 같다.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나는 바로 아빠를 찾았다. 아주머니는 아빠가 읍내에 약을 사러 가셨고 눈이 많이 와 버스가 언제 올지 몰라 날이 밝기 전에 서둘러 떠나셨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아빠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한참 동안 이야기해 주셨다.
아마 아빠는 밤새 앓는 나를 지켜보며 얇게 입힌 자신을 책망하셨을 것이다. 해가 뜨기를 기다릴 수 없어, 어스름한 새벽길을 애타는 마음으로 걸으셨을 것이다.
몇 해 전 관계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던 어느 날 나는 내 안에 깊은 애정 결핍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워 신께 치유를 구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다 문득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어느 시골집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방 안에는 작은 여자아이가 흐느끼고 있었다. 그 아이가 가엾고 애처로워 나는 꼼짝도 못한 채 눈물만 흘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왜 평생 자기 연민 속에 머물러 있었는지, 늘 마음이 답답했는지를 .
그때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
그 말은 몇 번이고 메아리쳐 울렸다.
끝내 아이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무너졌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자식을 떠나야 하는 모성의 절절한 마음이 스쳤다. “어쩌면 엄마도 나를 떠날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생각하니 감정은 더 북받쳤다.
하지만 더 미룰 수 없다는 위기감이 강하게 나를 짓눌렀다. 나는 힘겹게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ㅇㅇ아 너를 버리는 게 아니야. 우리는 잠시 떨어지는 거야. 세상에서 많이 배우고 성장해, 반드시 너를 만나러 올 거야. 어둠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꼭 붙들기를. 언제나 고맙고 사랑해.”
내 깊은 상처의 뿌리를 알게 되자 마치 컴컴한 터널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홀가분했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자유로움이었다.
그 뒤로 내가 치유되고 성장할수록 내면의 아이도 함께 행복을 찾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그 아이가 내게 말을 건넨다.
“난 네가 자랑스러워. 언제나 네 곁에 있었으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항상 고맙고 사랑해.”
치유의 글을 쓰며 깊은 상처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저릿했지만, 그 아픔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사랑의 조각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랑은 단지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아빠가 매서운 추위를 뚫고 오로지 나를 위해 걸었던 그날을 마지막 조각으로 맞추려 한다.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새기며 따뜻한 심장으로 나는 다시 태어난것이다.
아, 이제 세상 밖으로 펼쳐진 봄을 가슴 가득 맞이하고 싶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고 큰 소리로 외치리라.
“나 다시 태어났어요.”
“나 다시 태어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