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색무취의 물이 나에게 필요한 이유.
‘물 마시기‘
주말 동안 서울에 방문할 일이 생겨, 서울에서 짧은 2박 3일의 시간을 가졌다.
물론 재미는 있었다지만, 그놈의 술. 술술. 술술술.
적지 않게 먹은 그 술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을 빼고 나면 (그 술을 먹는 게 해야 할 일이었나 싶기도 하지만) 아무것도 못했다는 게 조금 아쉬운 발걸음.
제목이 물마시기면서 왜 술이야기만 나오나 싶더니만, 한동안의 술과 커피로 절여진 몸이, 겨우겨우 버텨낸 주말을 지나고 나자, 마신 것이 많은 것과는 무색하게 온 방향으로 ‘갈증’을 호소하더라.
눈은 뻐근하고, 비강은 말랐고, 입술은 트고.
모든 유동체가 같은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걸 매번 알면서, ‘마시는 건 다 상호 보완적이야’ 같은 핑계 좋은 헛소리로 대충 넘기는 일을 뒤늦게 상환하는 일은, 이제껏 반복해 왔어도 또 하는 걸 보면 아직 철이 들려면 멀었다.
신체적 가뭄 상태. 생존과 직결되지 않을 만큼의 수준이라 하더라도, 이를 ‘개인적 불편감’ 수준에서 느끼고 있다면 사회적으로는 ‘재난’ 상황이다.
개인적인 증상들을 열거해 본다.
붓기, 피곤, 폭식, 감정조절의 어려움(대부분, 예민함), 안구건조, 피부상태의 악화, 구내염, 구취, 그 외 등등…
어찌하나 가벼운 것이 없는 신체의 ‘그라운드 제로’. 그리고 이게 ‘물’이라는 것 하나가 부족해서 생기는 재난이라고 생각하니, 인간의 70%가 물이라는 말에 동의를 안 할 수가 없다.
‘물 마시기’라는 행동이 참 의외로 예삿일이 아님은 의외로 자명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오죽했으면 ‘물 마시기 어플’ 같은 게 한때 유행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전부터 느꼈던 ’~~를 물처럼 마셨다.‘라는 말에 조금은 의문이 들 정도.
물과 몸의 대화.라고 할지, 결국 ‘갈증’이라는 신호를 제외하면 특별한 신호도 없는 편이라서 얼마나 둔감하게 반응하는지, 이미 물이란 게 얼마나 잔뜩 말라버리고 나서야 반응하는지… 생각하면,
더더욱 ‘물’이란 것에 신경을 쓰는 일이 그 중요성에 비해 얼마나 과소평가 됐는지, 그만큼 ‘물 마시기’란 꽤 주체적으로, 수많은 선택들을 지나쳐 ‘물’이라는 정확한 지점에 도달해야지 가능한 일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 듯하기도 하고.
물 마시기의 주체성. 을 이야기 하자면, 또 이게 참 어렵다.
기본적으로 밖에 나가게 돼서, 누구를 만나던지, 시간을 보내던지.
하는 경우에 ‘물’을 챙긴다는 건 또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 물 한잔 해요 ‘하며 만나는 사람이 없고.
독서엔 커피가, 사유엔 차가, 영화엔 탄산이!
거의 모든 활동에는 또 그에 걸맞은 어울리는 음료가 딸려있다 보니, 이 모든 걸 제치고 ’ 물‘을 선택하는 건 이 역시 꽤나 결심이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결국 ‘물’이란 것에 생각하고 집중한다는 건 결국 ‘자기 스스로’에 집중한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물은 대화의 수단이 아니며, 유흥의 수단은 더더욱 아니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량이 있지만 쾌적한 삶을 위해선 그것보단 더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그 방향성은 자기에게 향해야 하고.
커피도, 차도, 음료도 하다못해 과일까지도 수분을 채워줄 순 있어도, 그 부족한 순수성은 곧 ‘이뇨작용’을 통해 배출해 버리는 걸 보면, ‘물’ 이란 것의 특수성에는 참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렸다.
브리타 정수기에 물이나 받아야겠다.
결국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간단하게 ’ 앞으론 물 잘 챙겨 마시겠습니다.’ 정도겠다.
다만, 이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조금 더 저 스스로에게 집중해 보겠습니다.’라는 의미가 들어있겠다.
이번 서울행을 마지막으로 올해의 큰 이벤트들이 꽤 정리된 느낌이다.
이젠 술이든 커피든 차든, 사사로운 이유를 만들지 않고서야 마실이유가 하등 없어진 덕에 이런 생각도 해본다.
한때는 ‘나무를 닮은 사람’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그걸 꽤 장점이라고 생각했으니, 조금은 더 닮아보려는 노력을 해야지.
술 먹는 나무라니, 그건 좀 이상하잖아. 차 마시는 나무나 커피 마시는 나무는 너무 고상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