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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

현재를 사는 삶과 알아차림의 미학.

by 후기록

퍼펙트 데이즈를 봤습니다. 사실 사전정보가 전혀 없이 ‘야쿠쇼 쇼지’라는 배우의 캐스팅 하나만 믿고 시도한 경우라서 큰 기대 없이 봤던 영화였어요. 덕분인지 아니면 그저 좋은 영화라서 그런지 큰 울림을 받았어요. 아마, 올해의 영화의 리스트에 무리 없이 올려놓기 좋을, 그런 영화였습니다.


완벽한 삶이라는 건 어떤 걸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의 삶은 항상 공개되는 부분들은, 언제나 삶의 ‘하이라이트‘ 다 보니, 그런 큰 이벤트가 많이 있어야 행복하거나, 만족스러운 삶이라는 믿음이 약간이나마 존재하는 듯해요.

무엇보다 요즘 같은 시기엔, SNS 같은 것이 모두에게 쉬이 닿아있는 삶이라 더더욱 그렇고요.


다만 삶이란 것은 그런 이벤트 사이의 ’ 일상‘이 사실은 거의 대부분이라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과 다르게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체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고 느낍니다. 아침에 일어나고, 이불을 정리하고, 양치를 하고, 머 리를 감고, 외출준비를 하고. 이러한 자질구레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24시간이라는 하루가 완성이 된다는 사실을, 그것들은 너무나 사소해서, 그리고 너무나 자주 일어나서 스스로의 기억에 쉬이 잊어버리는 것들이 되어버린다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그런 ’변하지 않는 자신만의 반복’이 ‘기쁨’같은 거대한 감정이 아니라 ‘행복’하다는 조금 소소하고 작지만, 물리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은 매일의 쿠션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만큼 중요한 일 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것들의 소중함을 조금 간과하면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히라야마’의 삶은 그런 식입니다. 매일 같은 루틴을 반복하면서도, 그 반복에서 오는 것들을 ’버겁거나, 힘들거나,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옅은 미소를 동반하는 삶의 조각으로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그런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조금씩 바뀌는 것들. 노숙자의 매일 다른 몸짓이라던지, 바람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나무의 그림자 들과 같은. ‘지금 현재’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절대 눈치챌 수 없는 것들을 발견했을 땐. 평소보다 조금 크게 웃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남들이라면 관심가지지도 않고, 아니면 오히려 기피할 직업을 가진 히라야마는, 길을 잃어버린 아이와 그의 엄마의 태도를 대하는 데에 있어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어쩌면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는 엄마의 무심한 ”무례함“에 표정이 굳다가도, 아이의 인삿손짓에 이내 또 환하게 웃어버리는, 너무 많은 걸 느끼고 보고 있어서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것들을 참 다행스럽게도, ’좋은 것‘들로 받아들이는 히라야마의 삶의 태도는 참, 배울 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나중은 나중, 지금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그. 필요한 말이 아니라면 기본적으로 침묵을 유지하고, 주변의 일에 대해서 크게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직업부터 남들이 기피하는 ’화장실 청소부‘라서 불특정 다수에게 ‘싫어할 만한 일을 대신 자처해서 하는’ 그런 도움을 주는, 주변인들에게도 (반 억지였지만) 도움을 주거나, 어떤 잘못들은 또 눈감아주는, 참 ‘무해한 인간’입니다. 그러면서도 주변에 참 좋은 영향을 주는, 멋진 사람이고요. 그런 일들이 지나고 나서도, 그저 너털 하게 웃어버리고 마는 모습이, 어쩌다 생기는 안 좋은 일도, 기대하지 않은 큰 기쁨에도, 평등하게, 과하지 않게 웃어 보이는 태도가 참 와닿더랍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런 것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태도 말입니다. 히라야마의 과거는 아주 단편적으로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삶을 떠날 생각은 아직은 없어 보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몇백 원으로 사 먹은 캔커피가, 1000원에 헐값에 팔리는, 어쩌면 ’저평가 된‘ 책들을 발견하는 일이, 퇴근하고 마시는 소박한 하이볼이, 어쩌면 자기가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를 다른 삶을 뛰어넘는 기쁨이라는 것. 과거를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눈물을 참을 수 없이 슬플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지금이 기쁨을 느낄 수 없는 이유가 되진 않는 것 같습니다.


몇몇 사람들과의 드라마 역시 적절한 순간에 잘 펼쳐지는 듯해서, 비단 지루할 수도 있는 이 영화에서 참 좋은 환기를 주는 듯했습니다. 좋더랍니다. ‘설명하지 않는 영화’, ‘보여주는 영화’ 이런 영화는 언제나 매력적입니다. 70-80년대에 쓰여 현재까지 기억되는 올드 팝처럼. 빛이 바래지 않는 오랫동안 가치를 유지하게 될 것 같은 영화를 봐서, 참 고마운 기분입니다. 역시, 감사할 일입니다.


이 모든 설명을 담아. ’코모레비‘라고 하는 나무의 그림자를 의미하는 단어를 마지막에 적어봅니다.

우리나라 단어로는 ’볓뉘‘라고 하더라고요. 흘려보면 매일 같아 보이는 그런 사소한 것들을, ’절대, 똑같을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아차림으로써, 그 변화를, 그 변화를 발견한 자신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를 가지게 되면 좋겠습니다. 소소한 미소를 잃지 않는 법을 조금이나마 깨달은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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