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08 댓글 7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할배하고 나하고>               창작 노트

조부님과의 가상 대화

by 이에누 Mar 13. 2025
아래로

할아버지가 된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다. 믿기지 않을 만큼 시간 참 빠르다. 처음이자 유일한 손녀가 태어났을 때의 설렘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세 돌이 지났다. 그 동안 손녀가 나에게 준 기쁨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 작은 손, 토실토실한 볼, 그리고 서툴게 걸음마를 배우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이제는 더 이상 아장아장 걷는 아기가 아닌, 똑부러지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어린이가 됐다.


요즘은 가족 톡방에 손녀 사진이나 동영상이 올라오면 일단 멈추고 보게 된다. 한 장 한 장 넘겨보면서 혼자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많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손주의 사진을 프로필로 해놓은 친구들을 보면서, "아직 자기 인생 살 나이에 벌써 손주한테 빠졌냐?" 하고 살짝 빈정거리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손주 바보'가 바로 나다. 매번 손녀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볼 때마다 세상이 조금 더 밝아진다. 이게 바로 내가 몰랐던 할아버지의 기쁨이겠지.


손녀는 요즘 자기 표현이 부쩍 많아졌다. 뭐가 싫은지, 뭐가 좋은지 정확하게 말한다. "싫어! 안 할래!" 혹은 "약 안 먹을꼬야!" 같은 말을 할 때면, 그 아이의 아빠 엄마는 당혹스러워 하지만 나는 마냥 귀엽기만 하다. 그 작은 입으로 그렇게 단호하게 자기 의사를 전달하는 모습은 반항기인지 애교인지 구분이 안 갈 때도 있다. 할아버지로서는 뭐든 다 들어주고 싶지만, 그래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법도 가르쳐야겠지.


이제는 손녀와 조금 더 깊은 대화를 나눌 날을 기대한다. 지금은 간단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짧은 대화가 대부분이지만, 언젠가 "할아버지, 오늘 뭐 했어요?" 같은 말도 물어보겠지. 그 날이 오면, 우리 둘만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손녀 바보가 된 나를 보며, 삶이 참 풍요로워졌다는 걸 느낀다. 딸이나 아들이 아닌, 손녀에게서 느끼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랑. 그 사랑 덕분에 하루하루가 더욱 소중하고 감사하다.


장충단공원에서 조부님을 만나다!


독립청원서에 연명하신 파리장서비(巴里長書碑)를 또다시 장충단공원에서 마주하니 문득 할아버님이 떠오른다. 살아 계셨다면 나와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할아버님의 프로필이 나온다.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자유(子裕), 호는 침산(枕山). 이수인(李洙仁)[1880~1963]은 1880년 5월 11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용흥2길 45-18[용흥리 716]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어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석학(碩學)으로 명성이 있었다. 1905년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스승 이승희와 함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배일 언론 투쟁을 전개했으며, 1908년 대한협회 성주지회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 5월 이승희가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할 때 이덕후(李德厚)·정인하(鄭寅夏) 등과 함께 수행하였다.


1909년 겨울 이승희가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위한 자금 모집을 시작할 때,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후 1910년 7월 이승희의 둘째 아들 이기인(李基仁)과 함께 다시 출국하여 독립운동 기지 한흥동(韓興洞) 개척에 참여하였다. 1916년 3월 이승희가 북만주의 봉천(奉天)에서 사망하자 고향인 성주로 반장(返葬)하였다.


1919년 3.1 운동의 전국적인 확산 분위기에서 유림단이 프랑스 파리의 만국 평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파리 장서[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여 제출할 때,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또한 통고문을 만들어 문도(門徒) 이수종(李洙宗), 이수창(李洙昌), 이수인(李洙寅), 이수영(李洙英) 등에게 각 동리에 배부하게 하였다.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경에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나 수천 명의 군중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출동한 일제 군경의 총격으로 사상자들을 내면서 일단 흩어졌다.


일제 경찰이 주동자들을 검거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파리장서운동[제1차 유림단 의거]이 발각되었고, 파리 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한 많은 유림 대표들이 검거되면서 이수인도 함께 붙잡혔다. 투옥 중 기소된 이수인은 1919년 7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63년 1월 10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독립유공자로서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전: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13권, 국가보훈처. 1996년)

장충단공원 파리장서비장충단공원 파리장서비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애국지사들독립청원서에 서명한 애국지사들
브런치 글 이미지 3

기록된 자료에 의하면 조부님은 또한 문학에도 조예가 깊으셨던 것 같다. 2019년 성주문화원에서 주최한 학술대회에서 발제된 한 논문이 그 사실을 방증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 분의 시와 산문, 서화, 논문, 서간문 등을 모아 필사본으로 정리한 유고문집 <枕山隨錄>은 모두 8권으로 되어 있다.

undefined
undefined
이수인 문집 <枕山隨錄>과 <輓詞集>

詩는 302수, 挽詩 200수, 書 56편, 序 16편, 記 15편, 跋文 7편, 說 6편, 論 6편, 通文 5편, 箴 2편, 銘 9편, 贊 6편, 上樑文 5편, 行狀 5편, 傳 3편, 墓碣銘 8편, 祭文 46편, 告由文 13편, 雜著 8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으로 枕山에 대한 輓詞, 祭文, 行狀, 墓銘, 訃告錄 등을 수록해놓았다.

성주문화원 학술발표 논문집성주문화원 학술발표 논문집

당시 발표자는 가능한 한 침산의 행적과 연계된 시를 중심으로 그의 문인으로서의 정감세계를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그의 시는 독서와 산과 詠物을 주요한 키워드로 창작되었다. 침산은 독서를 통하여 지식인으로서의 자질을 추구하였고, 산을 통해 공간을 의지화하였으며, 마음을 세우고 행실을 제어하며 학문적 실천을 도모했다고 파악된다.


이 기회에 조부님의 행적과 시문들을 일일이 추적해서 수집하고 정리하고 고증, 분석하는 일에 혼신을 다하신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김승룡 교수님께 자손의 한 사람으로서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틈틈이 써 모은 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것도 바로 이런 노력을 스스로 하는 의미를 가진다.

브런치 글 이미지 7
문집 <침산수록>과 추모 輓章이 수록된 만사집문집 <침산수록>과 추모 輓章이 수록된 만사집

할아버님의 생애를 보면 역사에 족적을 남긴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 비해 나는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했지만, 인터넷에서 이름을 검색해도 대단한 프로필은 나오지 않는다.


선조의 유명세는 후손의 노력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조부님의 행적과 업적, 자료들을 찾아서 동분서주하신 큰집 사촌 형님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자료들을 수집,편찬,기록,등재하기 위해 헌신적인 노고를 다한 끝에 독립운동가로서 조부님의 진면모를 발견한 것이다.


할아버님이 돌아가실 무렵 나는 다섯 살쯤이었다. 무릎에 앉아 천자문이나 소학 같은 한서를 배우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긴 턱수염이 드리워진 얼굴에 형형한 눈빛과 인자한 미소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많은 손주들 중 한 명에 불과했지만, 고인이 된 모친의 말씀에 의하면 할아버님께 나도 큰 애정과 기대를 받았던 것 같다.


할아버님이 살아 계셨다면 지금 나와 어떤 대화를 나누셨을까?




침산 이수인을 추억하다!

조부님과의 상상 속 대화


나: 할아버님, 그 동안 평안하셨는지요? 가끔씩 할아버님 생각이 났습니다. 할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지금 세상을 어떻게 보셨을까 궁금해요. 저도 어느 듯 손녀를 본 나이가 됐습니다. 할아버님도 제게 그랬듯이 정말 사랑으로 가득 찬 눈길로 손녀를 보곤 합니다. 할아버지와 나눴던 그 짧은 시간이 문득문득 떠오릅니다.


할아버지: 그래, 내 손주. 네가 자란 모습을 지금 이렇게 볼 수 있어 참 기쁘다. 그때는 너도 참 예쁘고 귀여웠지. 네 부모들이 널 얼마나 아끼고 키웠는지 내가 다 지켜봤다. 내가 너를 가르쳤던 그 시간이 나도 많이 소중했다.


나: 조금씩 희미해지기도 하지만, 할아버님이 제 머리를 쓰다듬고 천자문을 가르쳐 주셨던 모습이 가끔씩 떠오릅니다. 흰 수염도 기억나고요. 할아버님께서는 늘 진중한 모습으로 저를 바라보셨죠. 지금도 저희 가족에게 큰 자랑이십니다. 특히 형님들이 할아버님의 행적을 밝혀 주셔서 후손들이 그 덕을 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그 노고가 참 고맙구나. 내가 살아온 길이 후손들에게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가장 큰 기쁨이다.


나: 할아버님, 독립운동을 하셨던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세상이 참 많이 달라졌어요. 일제에 항거하시던 그 결의와 정신은 지금도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은 평화롭기도 하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복잡해요. 할아버님이 보셨다면 어떻게 생각하셨을지 궁금합니다.


할아버지: 세상은 항상 변하고, 그 속에서 후손들이 길을 찾아가는 것이지. 중요한 것은, 네가 어떤 가치와 원칙을 지키느냐에 달려 있다. 내가 독립운동을 했던 이유는 단지 일본에 반대해서가 아니야. 자유와 정의를 위한 길이었고, 너희가 그 뜻을 이어나가며 삶 속에서 그 가치를 실천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나: 맞아요, 할아버님. 그 정신을 잊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저 자신도 회의가 들 때가 있지만, 할아버님이 걸어온 길을 떠올리며 다시 힘을 내곤 합니다. 할아버님께서는 당시 힘든 선택을 하셨지만, 지금 우리는 그 결단 덕분에 이렇게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 그렇다. 그 선택이 너희에게 의미가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는 네가 후손에게 무엇을 전해줄지 고민해보아라. 내가 너를 사랑했던 것처럼, 너도 자손에게 사랑과 가르침을 주는 어른이 되길 바란다.


나: 네, 할아버님. 저도 그렇게 해주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저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하면서, 할아버님께서 주신 가르침을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할아버지: 그래, 네 삶 속에서 나의 가르침이 함께하길 바란다.


나: 할아버님, 지금의 세상은 당시와는 많이 다릅니다. 일본과의 관계도 많이 변했어요. 지금 저희 세대는 일본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류하고 있지만, 관계는 여전히 복잡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적대감을 가지고 있고,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목소리도 큽니다. 이런 상황을 보신다면 어떤 생각이 드실까요?


할아버지: 세상은 변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지. 내가 싸운 것은 일본인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행한 부당한 일들이었다. 증오가 또 다른 증오를 부르지 않도록, 너희 세대는 더 현명하게 그 복잡한 관계를 풀어가야 할 것이다.


나: 현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우호적인 동맹을 맺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비판도 있는데, 할아버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할아버지: 외교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야.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켜야 하지.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역사를 잊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외교는 항상 균형을 찾아야 하는 법이지.


나: 최근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처리수 방류 문제로 논란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과 환경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어요. 할아버님은 어떻게 보시나요?


할아버지: 그 문제는 심각하게 다뤄야겠구나. 우리 시대에는 과학적 위험을 이렇게 깊이 다루지는 못했지만, 사람들의 생명과 환경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문제에서는 과학적 근거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감정적인 반응보다는 정확한 정보를 기반으로 대처해야 한다.


나: 할아버님 당시, 한국인들은 법적으로 일본 식민지 국민이었잖아요. 그 억압 속에서도 어떻게 자존을 지키셨나요?


할아버지: 우리는 결코 일본의 국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마음속에는 언제나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독립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아무리 억압받아도 우리 정체성은 꺾이지 않았지. 교육과 정신을 통해 우리 문화를 지키고 후손들에게 그 뜻을 전하려 노력했다.


나: 그렇군요. 그럼 할아버님께서는 미래에 우리가 일본인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고 보시나요?


할아버지: 너희 세대는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구나. 일본인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고,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하지만 그 관계 속에서도 우리 역사를 잊지 말고, 자존감을 지켜나가야 한다. 과거의 상처를 잊지 않되, 그것이 현재와 미래를 가로막지 않도록 조화롭게 살아가야 한다.


나: 할아버님,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조부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Q&A]


Q. '할아버지와 손주'라는 주제를 어떻게 풀어나가고 싶었나요?


A. 손녀의 세 돌을 앞두고, 내가 할아버지가 된 지난 3년을 되돌아보고 싶었습니다. 요즘 손녀가 부쩍 자기주장이 강해졌는데, 그런 모습을 보며 내가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죠. 특히 내 할아버지, 이수인 선생의 삶과 손녀를 향한 나의 애정을 연결 짓는 과정이 흥미로웠습니다.


단순한 추억담이 아니라,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사랑과 가르침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나 역시 어린 시절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한자를 배웠고, 이제는 내가 손녀를 바라보며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연결 고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Q. 글의 흐름을 보면 손녀 이야기에서 조부님의 이야기로 확장되는데, 의도한 구성인가요?


A.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했습니다. 손녀를 통해 내가 '할아버지'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되니까요. 손녀와의 현재가 과거의 기억과 연결되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하면 독자들도 자신들의 가족사를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Q. 조부님의 독립운동 관련 이야기를 포함한 이유가 있을까요?


A. 가족의 정을 넘어 조부님의 삶이 역사와 맞닿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나 역시 손녀에게 어떤 삶을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어요. 조부님이 후손들에게 남긴 정신과 가치를 손녀에게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Q. 마지막에 조부님과의 상상 속 대화가 나오는데, 이런 형식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단순한 사실 나열이나 선조에 대한 칭송보다는 감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직접 만날 수 없는 조부님과의 대화를 상상하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풀어낼 수 있었어요. 마치 조부님이 내 고민에 조언을 주는 느낌을 만들고 싶었죠. 독자들도 자신의 조부모님과의 관계를 떠올리며 감정 이입할 수 있도록요.


Q. 이 글을 통해 독자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길 바라나요?


A. 가족의 사랑이란 결국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것임을 느끼길 바랍니다. 내 손녀가 나를 보며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처럼, 나도 조부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죠. 독자들도 자신의 가족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따뜻한 감정을 느낄 수 있길 바랍니다.


Q. 앞으로 이 주제로 더 써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A. 손녀가 더 자라면 나와의 대화가 어떻게 변할지 궁금합니다. 또, 조부님의 문학적 흔적을 깊이 들여다보는 작업도 해보고 싶어요. 손녀와 조부님, 두 세대를 연결하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어떤 독자의 댓글]

상상 속의 대화가 참 따뜻하고 의미 있네요. 할아버지와 손자의 시간이 한 세대를 뛰어넘어 다시 이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정신과 가르침이 손주인 작가에게까지 닿아 있고, 이제 또 손녀에게 같은 따뜻한 애정을 전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에요. 손녀와의 시간 속에서 문득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세대 간의 연결과 흐름을 느끼는 모습이 참 감동적입니다.

할아버지와 나눈 상상 속 대화를 이어가면서, 지금의 시대에 대한 고민도 담아보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독립운동 당시의 가치관과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어떻게 다를지, 혹은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지 고민하는 부분도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손주에게 남기고 싶었던 가르침과 지금 손녀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연결해보면 더 깊이 있는 글이 될 것 같아요. 손녀와 함께한 하루를 담은 짧은 에피소드로 마무리해도 좋겠고요.

이 글을 더 다듬어 책이나 칼럼으로 정리해보는 것도 멋진 시도가 될 것 같네요. 손녀를 바라보는 작가님의 시선과 할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 따뜻하게 어우러지는 글, 계속 기대됩니다!

작가의 이전글 <설렘, 불안, 찰나의 행복> 창작 노트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