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의 선택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려있다
텔레비전에 유발 하라리가 나왔다.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등으로 이미 익숙한 밀리언셀러 작가다. 최근 《넥서스(Nexus)》라는 책을 들고 나와 독서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석기시대부터 AI까지, 정보 네트워크로 보는 인류역사'라는 부제가 시대의 트렌드를 담고 있다.
미래의 모습을 예측해 달라는 다소 무모한 질문에 웃으며 답한다. "나는 점쟁이가 아니어서 그런 건 모른다. 다만 미래를 위한 선택의 여러 갈래를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미래는 오늘 우리의 선택이 만들어 가는 결과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정치의 미래를 예측한다면?
당장 눈앞에 닥친 대통령 선거는 국민의 선택이다. 예비후보를 당심과 민심으로 결정하고 당선자를 민심으로 선택한다. 오늘 오후에 있을 대법원의 선거법 위반사건 선고는 또 하나의 사법적 선택이다. 당선이 유력한 후보를 국민이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앞둔 중요한 결정이다.
결국 미래는 누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방향이 바뀐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표, 정당 내부의 전략적 판단, 그리고 사법부의 판결까지... 이런 모든 선택들이 한국 정치의 미래를 직조해 나간다.
만약 정당이 '당심'에만 기댄 채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다면, 그 선택은 곧 외면으로 돌아올 것이다. 반대로 '민심'을 두려워하고 외면한 사법적 결정은 정당성과 신뢰를 잃게 된다. 정치의 미래는 단순한 연속이 아니라, 크고 작은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지금의 선택은 단지 한 번의 선거, 한 번의 판결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앞으로 국민이 정치에 어떤 기대를 품을 것인가, 정치가 국민에게 어떤 신뢰를 줄 수 있는가에 대한 기준이 된다. 정치는 예측이 아니라 책임이다. 그 책임은 선택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지금 내리는 선택이야말로, 우리가 맞이할 미래의 이름이다.
2022년 대선을 떠올려보자. 누군가는 “최악과 차악 중 하나를 고르는 선거였다”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변화를 향한 간절한 선택이었다”라고 기억한다. 같은 선거를 두고도 해석이 갈리는 이유는, 그 선택이 곧 각자의 이해와 전망을 반영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당심이 민심을 앞설 때, 그 당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내부 충성도만으로 후보를 결정한 정당은 이후 민심의 냉정을 견디지 못하고 흔들려 왔다. 2016년 새누리당이 그랬고, 202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민주당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결과는 몇 년을 끌고 간다.
사법부의 판단 또한 정치적 미래의 키를 쥔다.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 위반사건 선고는 단순한 유무죄 판결이 아니라, 유권자에게 그를 선택할 기회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중대한 분기점이다. 만약 법이 정치의 길을 차단하거나 무리하게 연장한다면, 그 법적 판단은 정치 이상의 무게를 지게 된다. 사법의 독립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사법의 결과가 정치적 현실과 충돌할 때, 그 파장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선택의 책임은 결국 유권자의 몫이다. 뉴스 헤드라인에 휘둘리거나 여론조사에 편승한 선택은 쉽게 사라지지만, 그 대가로 남는 현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정치는 밥상머리의 선택이다”라는 말이 있다. 결국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어떤 미래를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가에 따라 손이 가는 표의 방향도 달라진다. 정치는 거대한 이상이 아니라, 반복되는 선택의 누적이다. 그렇다면 다음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는 어떤 미래를 지지할 것인가?
정치인의 선택은 곧 정당의 운명을 좌우한다. 예컨대, 안철수는 여러 번의 분열과 합종연횡을 통해 중도라는 상징을 구축했지만, 그 선택들이 결국 '신뢰'보다는 '기회주의'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만들었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검찰총장에서 정치인으로 전환하는 선택으로 대선에 승리했지만, 그 이후의 국정 운영은 초심이 아닌 권력의 경직성을 드러내며 민심과의 괴리를 자초했다. 결국 정치인의 ‘결정’은 단지 본인의 진로나 커리어가 아니라, 수많은 유권자의 삶을 뒤흔드는 결과를 낳는다.
유권자의 선택도 예전과는 다르다. 과거엔 지역, 계층, 이념이 표심을 가르는 주요 기준이었다면, 이제는 ‘정치 혐오’와 ‘대안 없음’이 표심을 결정짓는 기준이 되어버렸다. “누구를 찍는다”보다 “누구를 막기 위해 누구를 찍는다”는 방어적 투표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정치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회피에서 비롯된 선택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무관심에서 오지 않는다. 잘못된 선택이 반복될 때, 무력감이 체념으로 굳어질 때 시작된다.
청년층의 선택은 그 안에서 또 다른 균열을 보인다. 2030 세대는 이념에 갇히지 않고, 정당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는다. 이들은 SNS를 통해 정보를 소비하고, 실용과 현실을 중시하며, 자기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정책과 태도에 반응한다. 2022 대선에서 20대 남성의 절대다수가 보수 성향의 후보를 지지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경향이 아니라, ‘기득권 진보’에 대한 반감과 ‘공정’이라는 키워드에 대한 집착의 결과였다. 반면 20대 여성은 그 반대로 움직였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분열은 심화되고 있다.
정치인의 선택, 유권자의 반응, 청년층의 움직임은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어느 하나만으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결국 정치의 미래는 다양한 층위의 선택이 만들어낸 거대한 파동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파동의 방향은, 지금 우리가 손에 쥔 선택의 무게로 결정된다.
정치가 반복된 선택의 누적이라면, 그 선택을 둘러싼 환경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바로 시민사회와 언론이다. 시민사회는 정치의 감시자이자 또 하나의 주체다. 광장의 촛불은 시민의 자발적인 선택이 어떻게 정권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그러나 촛불 이후 7년, 시민사회의 영향력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활동가들의 목소리는 점점 제도 정치 바깥으로 밀려나고, 거대 정당들의 정략적 프레임에 함몰되기 일쑤다. 변화의 에너지가 제도권 안으로 흘러들지 못하면, 정치가 다시 기존의 질서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언론은 민주주의의 인프라이자 선택의 방향을 조정하는 나침반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언론은 갈라진 진영의 확성기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같은 사건이 방송사마다 정반대로 보도되고, 정치인의 말꼬투리를 따다 헤드라인을 만들며, 국민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이념이 편집 기준이 되고, 조회수가 진실을 압도한다면, 국민은 무엇을 보고 제대로 선택할 수 있을까? 결국 정치인의 선택, 유권자의 반응, 청년의 움직임, 시민사회의 압력, 언론의 기능... 이 모든 것이 연결되어 한국 정치의 미래를 만든다.
완벽한 선택은 없다. 하지만 더 나은 선택은 있다.
정치는 매번 부서지는 파도처럼 실패하고, 그 실패 위에 다시 희망이라는 모래성을 쌓는 일이다.
바람은 늘 성을 무너뜨리겠지만, 우리는 또다시 허리를 굽혀, 손으로 미래를 그려간다.
선택은, 그저 점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싶은지를
세상에 남기는 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