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고수들의 자존심 탈탈 터는...
어쩌다 ‘숨고’를 알게 됐다. 굳이 설명 안 해도 다 알지? ‘숨은 고수’의 줄임말이라는 걸 나만 몰랐지, 다들 알고 있더군. 웨딩 촬영, 피아노 레슨, 번역, 수학 과외, 인테리어, 운동 코치까지... 온갖 분야의 고수들과 고객을 연결해 주는 플랫폼 앱이다.
서비스가 필요한 사람이 요청을 올리면,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제안서를 보내는 방식. 굳이 설명 안 한다 해놓고 죄다 설명해 버린 이 친절은 또 뭐람.
브런치스토리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책 두 권을 만들었다.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나니, 마음 한켠이 좀 심심해졌다. 틈틈이 메일을 주고받으며 교정도 보고, 책 만들기에 참견도 해가며 ‘오지랖’을 떨었지만, 그래도 허전함은 남더군.
해본 사람은 알지. 글쓰기도 그렇지만, 출간이라는 건 정말 인내의 연속이다. 제안서를 보내고 노심초사 답을 기다리는 시간이란, 거의 곰이 인간으로 환생할 지경이지. 몇십 번, 몇백 번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기를 거듭하다가 운 좋게 출간이 성사되어도 그때부터 또다시 기다림의 시작이다.
운이 좋아서 출판사와 바로 연결되었지만, 원고 정리, 초교 재교 삼교 사교 표지 디자인 확정, 삽입된 사진과 그림의 저작권 확인후 출처 명시
등등 넘어야 할 산들이 첩첩이었다.
우여곡절을 지나 마침내 발행일자와 ISBN 코드까지 박힌 표지 파일에 오케이 사인을 하고, 인쇄에 들어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또다시 감감무소식. 혹시 교보문고에 깔렸을까 싶어 대형 서점 사이트들을 검색해 봐도 눈에 안 띈다. 출판사에 물어보고 싶지만, 꾹꾹 눌러 참는 중이다.
어쨌든 책이 나오면 뭔가 하고 싶어졌다. 글쓰기 레슨이라도 해볼까? 내가 쓴 책을 교재로도 쓰고 싶고, 북콘서트 같은 것도 해보고 싶다. 그런 상상을 하던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숨고’ 광고를 보게 됐다. 그제야 ‘숨은 고수’라는 뜻임을 알았다. 나는 고수인가? 아니다! 혹시 고수일 수도? 아니면 ‘숨 쉬는 고수’?
이래저래 머리를 굴리다 결국 스마트폰에 ‘숨고’ 앱을 깔아버렸다. 만용이었다.
앱 설명을 다시 읽어봤다.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와 조건을 입력하면, 관련 분야의 고수들이 제안서를 보낸다고 했다. 대충 훑고 ‘그렇겠지’ 하고 넘겼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그 띄엄띄엄 읽기의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거래 중개 플랫폼의 상술에 보기 좋게 걸려든 셈이다.
숨고캐시를 충전하고, 포인트를 차감하면서 제안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광고회사 제일기획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다 대학에서 언론·미디어 전공 교수로 22년 재직한 작가입니다. 브런치스토리와 밀리의 서재에 에세이와 칼럼을 연재하고 있고, 『참견과 오지랖』, 『광고에 말 걸기』 등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어쩌고저쩌고...”
고객의 문의가 오면 이른바 ‘견적서’로 화답해야 한단다. 내 몸값은 얼마일까? 이 바닥은 처음이라 감이 안 잡혔지만, 그래도 시간당 10만 원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일주일에 두 시간, 최소 다섯 번. 눈 딱 감고 총비용 100만 원을 적어 자동 회신 견적서에 등록했다.
그런데 반응이 의외로 전광석화. 숨은 고수로 등록된 지 30분도 안 되어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사를 건네고, 정성껏 레슨 플랜도 안내했다. 하루 동안 다섯 명이 문을 두드렸다.
“제 프로필과 견적 받으셨죠?
자세한 건 협의 가능해요.
대면이든 온라인이든 편하신 대로 하시고요.”
대학에서 강의할 땐 이런 살가운 자세, 한 번이라도 취해봤나? 그때도 이랬다면 강의평가 점수가 늘 바닥은 아니었을 텐데.
숨고 입성 열흘. 그런데 아직 한 건도 성사되지 않았다. 정성껏 답한 채팅은 두어 번 이어지다가 끊긴다. 낚시 좋아하던 내가, 입질 한번 주고 도망간 이쁜 붕어들 때문에 시달린 실연을 겪고 있다.
다른 고수들 견적을 커닝한 결과, 내 시간당 10만 원은 터무니없는 ‘귀염뽀짝한 착각’이었다. 깎고 또 깎아서 말도 안되는 선까지 내렸다. 무료라고 써볼까 싶었지만, 생태계를 어지럽힌다며 안 된다더군.
‘고수는 무슨 고수냐. 그냥 퇴직자지.’
‘이 앱에선 2030이 대세인가 보다.’
‘혹시... 글쓰기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인기 없나?’
스스로를 탓하다가, 앱을 다시 둘러봤다. 다른 고수들의 프로필을 구경해 봤다. 내 또래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20~30대였고, 얼굴을 전면에 내세운 이들도 있었다. 상냥한 표정, 캐주얼한 복장, 짧고 간결한 소개글.
그래서 수정했다. 프로필 사진은 아들 결혼식장에서 억지웃음 짓고 있는 사진으로 대체했다. 소개글은 300자 내외로 줄였다. 가격도 조금 더 낮췄다. 그리고 다시 제안서를 썼다. 보냈다. 또 기다렸다. 그리고 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며칠 뒤, 앱을 열었는데, ‘보낸 제안서 0건’이라는 표시가 떠 있었다. 뭐지? 다시 확인해 봤다.
오류였는지, 아니면 내가 실수로 저장만 해두고 전송을 안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허탈했다.
그래서 이번엔 정말로, 확실하게, 정성껏 제안서를 다시 썼다. 한 건, 두 건, 세 건. 그리고 며칠을 또 기다렸다.
그래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누군가의 글을 봐주며 용돈벌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마음은 서서히 식어갔다.
‘이제 글쓰기조차도 젊은 사람들의 시장이구나.’
‘나는 너무 오래된 방식으로 말하고 있는 걸까?’
‘내 글은 누군가의 요구와는 조금씩 어긋나 있는 걸까?’
'알바하는 사람들이 고객인 척 가짜 문의하는 것일 수도.'
'견적 발송에 필요한 캐시 뽑아먹는 장사 앱 아닐까?'
자책도 해보고 분석도 해보고 의심까지 해봤다. 하지만 결국엔 그냥 이렇게 결론이 난다.
‘그냥... 타이밍이 아니었던 거지, 뭐.’
접자. 이건 나랑 인연이 아니다. 글을 돈벌이로 써보려던 시도 자체가 저열하고 치졸했다. 작가의 자존심이랄 게 남아 있다면, 글은 돈이 아닌 마음으로 쓰는 것이라고 우겨야 하는 거 아닐까?
그리곤 망할 놈의 '숨고'앱을 조용히 삭제했다.
설치 때완 달리, '톡' 터치 한 번으로 사라졌다.
'숨은 고수'들 꼬드겨서 충전된 포인트만 야금야금 빼먹는 못된 앱. 정성을 다해 올린 제안과 견적서를 받아만 보고 도망가는 정체모를 고객들. 대한민국의 진짜 고수님들! 영혼과 자존심을 다 털리기 전에 빠른 손절을 권합니다.
문득, 코로나 한참 돌 때 학생들과 수업하려고 만들었던 오픈채팅방이 떠올랐다. 고객이 아닌, 진짜 글쓰기 친구들과 놀아보고 싶었다.
‘이에누의 글쓰기 놀이터’라는 채팅방을 열었다. 검색과 링크 접속을 허용했고, 한 명이 입장했다.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본인 소개 부탁드릴게요.”
“소설, 시집 준비 중인 고등학생입니다.”
“반가워요. 혹시 제 프로필 브런치나 숨고에서 본 적 있으세요?”
“아뇨. 사실 어떤 톡방인지도 잘 몰라요...”
일단 기다려보자고, 다른 친구들 들어오면 같이 얘기 나누자고 했다. 카피라이터·대학교수 출신 작가라는 소개도 덧붙였다. 이쯤에서 일이 꼬였다. 숨고에 올렸던 레슨 플랜을 복붙 하면서 ‘시간당 O만 원’ 문구를 지우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캔디라는 프로필명을 보고 "여학생인 줄 헛다리!"라며 던진 농담도 한몫했다. 내가 잘못짚었다는 뜻이었는데 학생은 내가 카피라이터 출신작가라 광고창작 같은 거 레슨 하는 줄 알았다면서 "네, 제가 잘못짚었네요. 그럼 나가겠습니다"라고 발끈한다.
당황스러워서 "아니요. 나가지 마세요. 제가 문창과에서도 강의했고 지금은 작가로 활동하고 있어서 광고가 아닌 글쓰기 레슨 하려고 해요."
그리고 숨고에 업로드했던 레슨플랜을 다시 올렸다. 그리고 다시 올라온 답글.
"아. 네. 딱 제가 생각하고 있는 수업이네요.
근데 수업료가 있나요?"
"정해진 수업료는 아니고. 혹시 장소대여비나 다과비 정도로 생각한 최소비용인데 신경 안 써도 돼요."
거기서 끝났으면 될 일을 한 술 더 뜬 게 화근이었다. "혹시 돈 벌려고 이런 방 만든 걸로 생각?"
한참 동안 침묵. 어색한 정적.
"아무래도 헛다리 짚은 거 같네요. 비용 이야기도 그렇고. 교수님 출신 맞는지도 신뢰가 안 가네요.
그냥 저는 돈 내고 수업할 형편이 안 되는 것 같아요."
라는 말을 끝으로 답글을 쓰고 있는 도중에 홀연히 방문을 닫고 님은 떠나셨다. 수업에 실망했던지 강의실 문을 쾅 닫고 떠난 용감한 학생이 떠올라 씁쓰레한 순간이었다. 이래저래 뜻밖의 ‘의욕과잉’만 남았다. 그 후로 한동안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