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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걷는 여자

배우에서 시니어 모델로

by 이에누

한때 무대의 중심이던 그녀는 어느 날 그 자리를 스스로 내려왔다. 조명이 꺼지고, 카메라가 멈춘 자리엔 묘한 적막이 깃들었다. 처음엔 그게 평화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적막이 자신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었다.

대본을 보지 않은 하루가 쌓이고, 그녀의 이름이 점점 대본의 캐스팅 표에서 사라졌다.
대신 ‘누구의 엄마’, ‘누구의 이모’ 같은 역할이 제안되기 시작했다. 그조차 감사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언젠가부터는 카메라 앞의 자신이 낯설어졌다.

“정은 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공연이 끝난 뒤,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연출가의 말에 그녀는 웃었다.
“이제야 조금… 제 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에요.”

사실 그 자리를 다시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디션 탈락 통보에 익숙해질 즈음, 누군가는 그녀에게 ‘잊힌 배우’라 불렀다.
한때 카메라 앞에서 조명을 받던 사람이
이젠 병원 광고의 엑스트라로 겨우 서 있었다.
하지만 정은은 그마저도 놓지 않았다.
작은 배역이라도 대본을 품고 다니며 연습했다.
퇴근 후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대사 연습용 거울삼던 시절. 그 시절이 다시 무대 위로 그녀를 데려온 것이다.

그녀의 복귀는 뜻밖의 반향을 일으켰다.
리뷰엔 ‘정은의 귀환’, ‘진짜 연기란 이런 것’ 같은 문장이 줄을 이었다.
SNS엔 그녀의 대사가 밈처럼 퍼졌다.
박수와 찬사, 인터뷰 요청이 이어졌다.
그녀는 감사했지만, 어딘가 불편했다.
거울 속에서 묘하게 낯선 눈빛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다시 살아난 걸까,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재생되고 있을 뿐일까.’

어느 날, 대본 리딩을 마친 뒤 한 신입 배우가 물었다.
“선배님은 복귀 후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예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무대에서 박수를 받을 때가 아니라,
다시 무대에 설 용기를 냈던 순간이었어요.”

그 말은 스스로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알았다. 자신이 다시 배우가 된 건 찬사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었던 자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걸.

마지막 대사를 내뱉던 순간의 공기가 아직 몸 안에 남아 있었다.
관객의 숨소리, 커튼콜의 박수, 그리고 그 모든 걸 삼켜버린 정적.
그녀는 무대 위에 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이 박수는 누군가의 기대가 아니라, 자신이 견뎌온 시간에 대한 환호처럼 들렸다.

무대는 영광의 장소이기도 했지만,
언제든 사람을 집어삼키는 늪이기도 했다.
관객의 눈빛, 평단의 평, 박수의 강도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을 느꼈다.

그때 깨달았다.
‘다시 배우가 된다는 건, 다시 불안해진다는 뜻이구나.’

그리고 결심했다. 누군가의 시선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 연기하자.




그 무렵, 패션 디자이너인 윤서가 찾아왔다. 오랜 친구같은 후배다.


“언니, 이제 연기만 할 게 아니라 자신을 입어봐요.”
“나를… 입는다고?”
“언니, 요즘 시니어 모델 오디션이 있어요. 완전 언니 스타일이에요.”
“나? 모델이라니, 웃기지 마.”
“언니야말로 잘 걷는 여자잖아요. 무대에서도, 인생에서도.”

‘잘 걷는 여자.’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넘어지고, 주저앉고, 다시 일어서는 모든 과정이 떠올랐다.

며칠 뒤, 그녀는 윤서의 작업실로 향했다.
벽에는 흑백의 모델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누군가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누군가는 주름진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윤서가 말했다.
“이 사람들, 다들 각자의 시간을 입고 서 있는 거예요.”
그녀는 그 말을 곱씹었다.
“시간을 입는 무대라… 그건 멋진 말이네.”

마침내 오디션장에 섰다.
다양한 나이의 여성들이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아이와 함께 왔고, 누군가는 수십 년 만에 힐을 신었다. 정은은 대본 없이 그저 ‘자기 걸음’을 보여줘야 했다.
심사위원이 물었다.
“특별히 연습하신 워킹이 있나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그냥, 제 삶의 리듬이 있을 뿐이에요.”

음악이 시작되고, 그녀는 천천히 걸었다.
한 발, 또 한 발.
아이의 울음, 무대의 조명, 병실의 복도,
넘어졌던 그날의 통증까지—
모든 순간이 걸음에 실려 있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낮게 말했다.
“걷는데… 인생이 들려요.”

며칠 뒤, 합격 통보가 왔다.
“정은 씨, 다음 달 쇼 무대에 서주실 수 있나요?”

패션쇼 리허설날.
백스테이지는 분주했다. 젊은 모델들이 빠르게 오가며 분장대를 점령했고, 스태프들의 무전기 소리가 날카롭게 섞였다. 정은은 묵묵히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엔 은빛이 살짝 섞였고, 눈가엔 세월이 그린 얇은 선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주름 속에는 오히려 빛이 머물렀다.
민서가 다가와 속삭였다.
“선배, 오늘 무대는 젊음이 아니라 ‘존재감’을 보여주는 자리예요.
그냥, 정은 선배답게 걸으세요.”

조명이 하나둘 켜지고, 런웨이의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음의 베이스, 느린 현악, 그리고 카메라 셔터 소리. 정은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 발끝을 런웨이에 디뎠다.

첫걸음.
무대 위의 조명이 발끝을 감싸 안았다.
예전의 무대 조명과는 달랐다.
그때의 조명은 꿈을 비췄지만, 지금의 조명은 ‘삶’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었다.
속도도, 포즈도, 다른 모델들과 달랐다.
그녀의 걸음에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섰던 시간이 묻어 있었다.
균형을 잃지 않으려던 재활의 날들, 목발을 짚던 순간의 긴장감.
그 모든 기억이 걸음마다 숨결처럼 배어 나왔다.

관객석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저 사람… 배우 정은 아니야?”
“맞아, 예전에 드라마에서 봤던 그 사람.
근데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런웨이 끝에서 그녀는 잠시 멈췄다.
고개를 들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 짧은 순간, 관객석의 공기가 멎었다.
한 여성 관객이 무심결에 속삭였다.
“저건 워킹이 아니라… 삶이야.”

음악이 잦아들고, 조명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플래시들이 꺼지고, 런웨이 끝의 그림자 속으로 그녀의 실루엣이 서서히 사라졌다.
정은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우아하게, 자신의 리듬으로 걸어 나갔다.

백스테이지로 돌아온 그녀에게 민서가 다가왔다.
“선배, 완벽했어요.
사람들이 다 조용했어요.
누구도 숨을 크게 쉬지 않았어요.”
정은은 미소 지었다.
“걷는 동안, 예전 무대 생각이 났어요.
그때는 조명 속에 서 있었는데,
지금은 그 조명을 내가 품고 걷는 느낌이었어요.”

그날 밤, 숙소에 돌아온 그녀는 일기장을 펼쳤다.
‘무대는 배우를 기억하고, 몸은 삶을 기억한다.
나는 이제 무대 대신 길 위를 걷는다.
그러나 여전히 내 안에는 배우가 산다.’




창밖에 겨울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잘 걷는다는 건, 그냥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야. 넘어졌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거지.”

그녀는 조용히 커튼을 걷고,
밤길을 천천히 걸어 나갔다.
불빛 하나, 발걸음 하나마다
그녀의 인생이 부드럽게 흔들리며 반짝였다.

그녀는 잘 걷는 여자였다.
무대 위에서도, 런웨이에서도, 그리고 인생 위에서도.




※ 이 글은 부산 영도구에 거주하는 최** 시니어모델 (66)의 실제 체험을 모티프로 한 다큐 픽션입니다. 그의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하되, 감정과 장면은 '글쓰기'를 위해 재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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