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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환생

디지털 세상의 캔버스

by 이에누

그림이 팔리지 않는 날이 계속됐다.
화실 안엔 말라붙은 물감 냄새와 버려진 캔버스들, 그 위로 쏟아지는 겨울 햇살이 전부였다.
붓을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손끝의 색이 자신을 비웃는 듯했다.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어느 갤러리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아직 낯선 이름의 중년 사업가. 단 한 점이라도 좋으니 그의 그림을 벽에 걸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그 후원자는 직접 화실을 찾아왔다. 말투는 부드러웠고, 미소엔 여유가 묻어 있었다. “당신의 색을 좋아합니다. 세상에 이런 빛을 담는 화가는 드뭅니다.”
그 한마디에 그는 울먹일 뻔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내 색을 좋아한다는 말은, 내 삶을 사겠다는 뜻일까?’

그의 마음 한켠엔 늘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친구 폴 고갱, 그리고 동생 테오가 있었다.
동생의 돈으로 겨우 생계를 잇던 화가, 그리고 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소진하던 동생.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고갱. 우정과 질투, 예술과 생존이 서로를 물어뜯던 시간들.
그는 가끔 생각했다. “나에게도 테오와 고갱 같은 존재가 있는 건 아닐까?”

시간이 흐를수록 후원자는 세세히 간섭하기 시작했다. 전시 제목, 작품 배치, 초대 손님 명단까지.
“이건 너무 어둡네요. 이건 팔리지 않을 겁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밤마다 캔버스 앞에 앉아,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탄생한 신작의 제목은 〈테오에게〉였다.
무언의 도움에 빚을 갚는 의미를 담고 싶었다.
그림을 본 후원자는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이건… 내가 살 수 없는 그림이군요.”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다행입니다.”




대전 유성구 노은동의 주택가, 오래된 건물 3층.
벽에는 유화 캔버스가 빽빽하게 걸려 있고, 모니터에서는 NFT 경매 사이트가 깜빡인다.
붓과 마우스를 오가는 58세 염선의 손길.
“이 속도… 따라갈 수 있을까.”
그는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30년간 화실과 협회를 지켰다.
하지만 은퇴 후 작업실은 낯설 만큼 조용했다.
SNS와 NFT가 미술의 중심이 된 시대, 고립감을 느꼈다.
“내 그림이 아직 의미가 있을까.”
붓질은 조용히 대답했다. ‘아직, 살아 있다.’

제자가 찾아왔다.
“선생님, NFT 아트랑 AI 아트 해보실 생각 없으세요?”
“붓 끝이 살아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그날 밤, 모니터 속 젊은 작가들의 세계는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픽셀이 질감이 되고, 빛이 색이 되던 순간.
가슴속에서 사그라 들던 불꽃이 다시 피어올랐다.

그동안 그려 놓았던 작품을 스캔하고 포토샵으로 색을 조정했다. 직접 캔버스를 디지털화하기 시작했다. 스캐너로 작품을 옮기고, 포토샵에서 색감을 조정하고, NFT 마켓에 계정을 만들었다.
마우스와 화면은 냉정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NFT 아트¹와 AI 아트²의 경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했다.


하루 12시간씩 연습하며 붓끝 감각과 화면 속 색감을 연결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점점 손끝 감각과 디지털 화면이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 붓과 픽셀이 만나, 아날로그 감각이 살아 있는 디지털 작품이 탄생했다.
마우스는 차가웠지만, 손끝 감각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래, 이제 나도 여기에 있을 수 있겠어.”

NFT 경매 사이트에서 ‘AI 위작’ 논란이 터졌다.
“AI가 그린 이미지를 덧칠했을 뿐이다.”
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순간 빛이 스쳤다. 미술평론계에서 명망 있는 도슨트 한 사람이 우호적인 발언을 했다.
“AI는 도구일 뿐이다. 염선의 작업에는 인간 손의 리듬이 있다.”
잠시 일었던 논란은 가라앉았고, 그의 그림은 다시 주목받았다.

스스로 위안했다.
‘기계는 내 적이 아니야. 내 손끝을 확장해 주는 또 다른 붓이야.’

전시회 당일, 화실의 작은 창고처럼 느껴졌던 공간이 수많은 관객으로 채워졌다. 젊은 팬들은 스마트폰으로 그의 그림을 찍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중얼거렸다.
“아날로그 감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디지털의 빛이 있네요.”
그는 조용히 웃었다.

한 컬렉터가 말했다.
“붓질에서 전통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AI가 섞여 있어 놀랍네요.”

염선은 관객석 뒤에서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
“이제야, 내 그림이 나만의 세상이 아닌, 모두의 세상이 되었구나.”
그의 미소는 세상을 향한 감사와 자기 확신으로 가득했다.

전시가 성공하자, 후원자가 다시 연락을 해왔다.
“당신의 새 그림, 디지털 버전으로 내 브랜드 홍보에 쓰면 어때요?”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건 제 그림의 맥락을 바꾸는 일입니다.”
“예술도 시장 안에서 살아야죠.”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예술이 시장에 살아남으려면, 시장보다 먼저 흔들려야 합니다.”
후원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화 이후, 그들의 관계는 끝났지만, 그는 이상하게도 후련했다.
“이제 진짜 내 그림을 그릴 수 있겠구나.”

화실 창밖엔 도시의 네온이 흐르고, 모니터 속에는 NFT 경매장의 숫자가 깜박인다. 그는 화면을 끄고 캔버스를 바라본다.

“붓을 놓지 말고, 시대와 대화해라.
그러면 그림은 결국 너와 함께 살아 있을 거야.”

제자들은 그를 디지털 실험실로 불러들였다.
“선생님, 이 AI 필터 써보세요. 색감이 훨씬 풍부해져요.”
그는 잠시 망설이다 붓을 내려놓고 직접 화면을 조작했다. 손끝 감각과 AI 계산이 결합하자, 전통 화가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는 작품이 완성됐다.

국제 디지털 아트 페어에 초대되었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그의 작품은 찬사를 받았다.
“아날로그 감성을 디지털로 이렇게 살린 작가는 드물다.”
그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말했다.
“이제야 내가 살아 있음을 느껴.”

오늘도 화실에는 붓과 모니터가 나란히 있다.
붓으로 그리며, 동시에 화면 속 픽셀을 조정한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감각과 화면 속 계산된 색이 공존한다.
혼잣말을 되뇐다.
“변화는 두렵지만, 시도하지 않는 게 더 두려워.”




좋은 날만 오래가진 않았다.
전시를 준비하던 어느 날, 왼쪽 눈이 흐릿하게 번졌다. 병원 진단은 초기 녹내장.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빛을 오래 보면 눈이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림을 줄이셔야 해요.”

순간, 마네의 이름이 스쳤다.
실명 위기 속에서도 수련을 그리던 마네,
어둠 속에서 빛을 찾던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떠올랐다.
그는 결심했다.
“빛이 사라지기 전에, 내가 본 빛을 남기자.”

그날 이후, 그림은 달라졌다.
색은 더 절제되고, 선은 단순해졌지만,
그 안엔 이전보다 깊은 감각의 울림이 깃들었다.
그는 더 이상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며 그렸다.
빛이 사라지기 전에 더 많은 빛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붓질은 간결해졌고, 색은 깊어졌다.
그림은 더 이상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 되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유럽의 한 컬렉터가 그의 작품을 구입했다.
“화면으로 봐도 온기가 느껴집니다. 실물을 보고 싶어요.”
그는 작품을 조심스레 포장해 해상 운송을 맡겼다.

하지만 몇 주 뒤, 소식이 왔다.
“작품이 선박에서 분실되었습니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보험, 법적 절차, 분쟁 서류… 그의 머리는 복잡하게 얽혔다.

그때 선박회사 직원이 그에게 직접 연락을 했다.
“끝까지 찾아보겠습니다. 그 그림엔 무언가가 있습니다.”
보름 뒤, 기적처럼 그림은 항구의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바닷물의 습기를 머금은 포장지 속, 그림은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주문자는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선생님, 작품이 살아 돌아왔군요. 아마도 그림이 제 주인을 찾으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신뢰’라는 단어를 예술의 언어로 이해했다.

그의 삶과 작품은 이제 리듬이 되었다.
붓의 질감과 픽셀의 빛, 전통과 디지털, 실패와 부활이 교차하는 리듬. 모든 것이 하나의 리듬으로 이어진다.




〈화실의 아침: 습작시절 제자의 회상〉

아침 일찍 화실에 들어섰다.
스승은 이미 붓을 들고 있었다.
“오늘은 색감을 조금 다르게 해 볼 거야.”
나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말보다 행동으로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붓끝에서 스며 나오는 시간과 경험, 그 섬세한 터치 하나가 수업이었다.

조심스레 질문을 드렸다.
“선생님, AI 작업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선생님은 잠시 멈추더니 웃으며 말했다.
“AI가 도와줄 수는 있어. 하지만 결국 색과 붓을 느끼는 건 네가 해야 해.”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은 기술과 감각 사이의 균형을, 하루하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아 새로운 시도를 해 나갔다.
AI 프로그램에 자신의 캔버스를 스캔해 입력하자, 화면 속 이미지가 변형되며 색감과 질감이 바뀌었다.
처음엔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이건 내 붓이 아니잖아…”
하지만 손끝 감각을 더해 조금씩 수정하자,
AI가 제안한 색조와 전통 붓질이 섞여, 놀랍도록 자연스러운 작품이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스승은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기계가 만든 것이 아니라, 내가 기계를 통해 내 감각을 확장하는 것이지.”
선생님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적이 아니라, 협력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 이 글은 대전 유성구에 거주하는 염* 화가 (58)의 실제 체험을 모티프로 한 다큐 픽션입니다. 그의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하되, 감정과 장면은 '글쓰기'를 위해 재구성되었습니다.


¹ NFT 아트: Non-Fungible Token, 즉 블록체인 기반으로 대체불가능한 자산가치를 창출하고 디지털 예술의 진위와 거래 기록을 증명하는 예술 형식.
² AI 아트: 인공지능이 생성하거나 인간과 협업해 만든 예술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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