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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의 귀환

시간이 흘러도 무대는 기억한다

by 이에누

초겨울 햇살이 소극장 천장 창틈으로 스며든다.
작은 무대 위, 관객은 고작 서른 명 남짓.
하지만 정은에게는 그 어떤 TV 세트보다 더 큰 세계였다. 20년 전 단역 배우였던 시절, 처음 조명을 받았을 때의 설렘이 되살아났다.

그때 그녀는 ‘떠오르는 신예’였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대사를 외우던 스물여섯의 정은은 언제나 눈이 반짝였다.
방송국 복도에서 선배 배우를 마주치면
긴장한 손끝으로 인사하고는, 돌아서서 몰래 웃었다.
단역이든 엑스트라든 상관없었다.
“이 카메라가 날 찍고 있다면, 난 지금 주인공이야.”
그 시절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며 살았다.

하지만 결혼, 육아, 생계는 그녀의 모든 대본을 바꿔놓았다. 오디션 대신 아이의 학예회, 리허설 대신 밤샘 가사. 삶의 중심은 가족으로 옮겨갔고, 배우로서의 이름은 점점 흐릿해졌다.

그녀는 종종 거울 앞에서 자신에게 물었다.
“이 얼굴, 아직도 배우일까?”
시간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의 웃음, 남편의 하루,
그리고 반복되는 생활의 소리들이
그 질문을 대신 삼켜버렸다.

달라진 것은 몸이 아니라, 시간이 만들어낸 마음의 결이었다. 거울 앞에 선 그녀는 주름진 손끝을 바라봤다.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지키며 쉼 없이 달려온 세월이 남긴 흔적. 굳은 어깨, 굴곡진 손마디, 그러나 그 안에는 여전히 소녀의 설렘이 남아 있었다.

“내가…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까?”
그 질문은 20년 동안 수천 번 머릿속을 맴돌았다.




늦은 아침, 커피를 내리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초짜 배우 시절 인연을 맺었던 연출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은 씨, 여성 배우 오디션이 있습니다. 나와보시겠어요?”

손끝이 떨렸다.
“20년 만에요… 제가 아직 할 수 있을까요?”
“무대는 배우를 기억합니다. 해보세요.”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울렸다.

망설임 끝에, 그녀는 대본을 들고 거울 앞에 섰다.
‘무대는 잊지 않는다. 몸이 먼저 기억한다.’
그 믿음 하나로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오디션 날,
그녀는 허름한 원피스를 입고 무대 중앙에 섰다.
심사위원의 질문이 이어졌다.
“최근 출연작은요?”
“없습니다. 다만, 오래된 연기 근육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짧은 대사 한 줄을 읽을 때,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그 떨림이 진심이었다.
끝나자 심사위원 중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분,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던 분이네요.”

며칠 뒤, 합격 통보가 왔다.

다시 무대에 올랐다.
첫 공연 날, 막이 오르기 전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르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 짧은 어둠이 오래 기다린 포옹처럼 느껴졌다.

조명이 켜지고, 대사가 시작됐다.
몸이 기억하던 리듬이 되살아났다.
무대 위의 그녀는 늙지 않았다.
그저 다시 ‘배우 정은’이었다.

인터뷰와 기사들이 쏟아졌다.
‘정은의 귀환’, ‘무대가 기다린 배우.’
그러나 찬사 속에서도 그녀는 문득 불안했다.
거울 속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건 내가 바랐던 무대일까,
아니면 다시 박수를 얻고 싶었던 욕망이었을까.’

첫 공연이 끝나고, 조용한 박수가 터졌다.
그 박수는 누군가의 기대가 아니라,
그녀가 견뎌온 시간에 대한 환호처럼 들렸다.

“정은 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연출가의 말에 그녀는 웃었다.
“이제야 조금… 제 자리로 돌아온 기분이에요.”

누군가는 눈시울을 훔쳤다.
한 청년이 속삭였다.
“젊었을 때보다 더 깊은 감정이 느껴져요. 진짜 살아있는 연기예요.”
조금 쑥스러워진 그녀는 숨을 고르며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저도 오늘 무대에서 많이 배웠어요.”

작은 소극장이라 관객과의 교감이 직접적이었다.
한 관객이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 연기는 그냥 연기가 아니에요. 삶의 흔적이 느껴져요.”
그녀는 잠시 말을 잃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림을 느꼈다.
그동안 무대에서 사라졌던 자신이, 관객을 통해 다시 살아난 순간이었다.




오래된 무대 동료의 부고를 들었다.
그녀와 함께 오디션을 보며 떨던 친구였다.
장례식장에서 본 그의 사진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이상하게도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
‘나도 다시 무대 위에서, 내 이름으로 웃고 싶다.’

그날 밤,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대본을 꺼냈다.
손때가 묻은 페이지를 넘기며 입을 떼는 순간, 목구멍 깊은 곳에서 묵은 먼지가 한꺼번에 밀려 나왔다.
“괜찮아요, 다시 시작하면 돼요.”
그녀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며칠 뒤, 작은 연극 오디션 공고를 발견했다.
출연료는 거의 없었고, 공연장은 대학로의 골목 끝 소극장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뛰었다.
‘이 무대라면 다시 숨을 쉴 수 있을지도 몰라.’

공연이 끝난 뒤, 아무도 없는 무대 위에 홀로 남았다.
텅 빈 객석을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나는 아직 연습 중이야.”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그녀는 이제야 진짜 자신을 배우로서 다시 쓰고 있었다.

세 번째 작품 리허설. 무대는 고요했고, 정은은 발을 내디뎠다. 대사는 기억나지만, 몸은 서툴렀다. 20년의 공백이 남긴 흔적이 여기저기 스며 있었다.

“이번엔 반드시 완벽해야 해.”

그러나 열정에 겨운 과욕이 화근이었다.
계단을 오르던 순간, 발이 미끄러졌다.
관객의 숨죽인 반응 속, 정은은 무대 위에서 넘어졌다.
팔과 다리가 심하게 부상했고, 순간 세상은 정지한 듯했다.

다시 시작했다. 재활운동과 물리치료, 통증 속에서도 그녀는 대사를 중얼거렸다.
목발을 짚고 계단을 오르며 한 걸음 한 걸음.
“무대는 내 삶의 일부다. 내가 포기할 순 없어.”

밤이면 일기장에 적었다.
‘넘어진 날의 공포가 오히려 연기에 깊이를 준다.
무대와 내 삶은 이제 하나다. 소녀였던 내가, 이제 퀸으로 무대 위에 서려한다.’

병원 복도는 늘 하얗게 밝았지만, 그 안에서의 시간은 늘 눅눅했다. 깁스를 한 다리로 몇 걸음 걷는 일조차 거대한 일처럼 느껴지던 날들.
정은은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왼발, 오른발, 균형, 호흡.
그 단조로운 리듬이 마치 삶의 연습처럼 느껴졌다.

퇴원 후에도 공백은 길었다.
전화기는 한동안 울리지 않았고, 대본은 더 이상 도착하지 않았다.
책장에는 예전 작품들의 포스터가 나열되어 있었지만,
그 얼굴들은 모두 낯설었다.
‘저건 지금의 내가 아니야.’
그녀는 중얼거렸다.

시간이 흘러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거울 앞에 서면 늘 몸보다 표정이 먼저 굳었다.
웃으려 하면 입가가 먼저 떨렸고, 대사를 중얼거리면 목소리가 공허했다.
“이제 관객이 나를 잊었겠지?”
그 생각이 들 때마다,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피했다.




오래 알고 지내던 연출가가 전화를 걸어왔다.
“정은 씨, 우리 작은 극단에서 새 연극을 올리는데, 주인공이 중년의 무용가예요.
대본을 읽으면 알겠지만, 지금의 정은 씨 얘기 같아요.”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큰 무대도 아니고, 조명도 빈약한 작은 공연장.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이, 다시 살아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연습 첫날.
지하 연습실의 공기는 눅눅했고, 형광등은 반쯤 꺼져 있었다.
젊은 배우들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선배님, 저 고등학교 때 선배님 드라마 봤어요.”
그 말에 정은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랬구나. 그땐 나도 젊었지.”

리허설이 시작되자 몸은 금세 무거워졌다.
대사를 외워도 입이 따라주지 않았고,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다리의 감각이 어색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몸이 기억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이래?”

며칠간 연습이 이어졌고, 점점 대사보다 ‘호흡’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대사를 절반쯤 잊은 채 움직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관객이 없는 연습실의 적막이 오히려 편안했다.
그 적막 속에서, 그녀는 다시 ‘배우’가 아닌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공연 당일, 소극장은 숨 죽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목발을 짚고 무대 위로 나서는 그녀의 그림자가 조명을 스쳤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숨은 짧아졌다.

첫 대사가 흘러나오자, 지난 20년의 기억이 겹쳐 떠올랐다.
아이의 울음, 늦은 밤 설거지,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관객은 숨죽였다. 손끝 하나, 시선 하나, 잠시 머무른 표정 하나까지가 폭발적인 감정을 담아 관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던 연출과 스태프가 중얼거렸다.
“이건 단순한 복귀가 아니야. 전설의 귀환이다.”

막바지 장면, 계단을 오르는 순간,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목발을 짚고 힘겹게 디딘 발걸음.
그러나 대사는 또렷했고, 눈빛은 단단했다.

관객석에서는 탄성과 한숨이 섞였다.
“목발이라니… 그런데 연기는 살아 있어!”
“넘어진 고통이 그대로 느껴진다.”

연출은 뒤에서 눈물을 훔쳤다.
“정은… 오늘 무대에서 잊을 수 없는 각인을 남겼어.”

목발의 리듬은 마치 새로운 춤처럼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는 다시 무대 위로 올라섰고, 부상투혼의 연기는 관객을 울렸다. 평단은 ‘전설의 귀환’이라 불렀다.

허리까지 땀에 젖은 그녀는 조용히 무대 뒤 벽에 기대었다.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작고 따뜻한, 그러나 오래 지속되는 박수였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살아 있네.”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박수는 나에게 보내는 게 아니라, 나를 버텨준 시간에게 보내는 거야.’

며칠 뒤 평단의 리뷰가 쏟아졌다.
“정은, 무대 위의 부활.”
“상처를 품은 배우의 진짜 얼굴.”
기자들은 그녀를 찾아와 “기적의 복귀”라고 썼다.

하지만 정은은 점점 그 말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던 중, 한 질문이 그녀의 마음을 스쳤다.
“다시 예전의 빛을 되찾으신 기분이 어떠세요?”
그녀는 잠시 웃었다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빛이라… 그건 다시 찾는 게 아니라, 스스로 켜는 거예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불을 끄고 거실 한가운데 섰다.
어둠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여전히 중심을 알고 있었다.
왼발, 오른발, 균형, 호흡.
그녀는 천천히 걸었다.
마치 무대 위에 선 것처럼, 그러나 조명 없이.

‘나는 아직 배우다.
단지, 무대가 조금 달라졌을 뿐.’

그녀의 걸음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병상에서 목발을 짚은 그녀는 한참 창밖을 바라보았다.
‘끝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인가…’
그러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소녀의 목소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넘어짐의 순간, 공백의 세월, 고통과 아픔까지.
그 모든 것이 오늘 그녀를 퀸으로 만들어줄 자양분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정은은 알고 있었다.
그건 귀환이 아니라, 또 다른 질문의 시작이었다.

‘무대가 나를 살렸을까, 아니면 다시 나를 묶고 있는 걸까?’




※ 이 글은 강릉시 주문진읍에 거주하는 표** 배우 (61)의 실제 체험을 모티프로 한 다큐 픽션 입니다. 그의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하되, 감정과 장면은 '글쓰기'를 위해 재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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