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향에 마법을 거는 사나이
유리창 너머로 햇살이 천천히 스며든다. 도심 한복판, 카페 〈하늘의 테이블〉.
겨울의 잔기운이 남았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공기가 달라진다.
커피 향이 바닥에서부터 피어올라 벽을 타고 흐르고, 스팀피처가 바람처럼 윙— 소리를 낸다.
하얀 앞치마를 두른 도윤은 무대 중앙의 배우처럼 움직인다.
그의 손끝에는 리듬이 있고, 커피잔 위에는 그림이 그려진다.
손님들은 그를 ‘쇼맨 바리스타’라 부른다.
“오늘은 어떤 무늬로 가볼까요?”
“아내 얼굴로요.”
그는 웃는다. “그건 아직 연습 중이에요. 대신 하트 두 개, 서비스로 드릴게요.”
거품 위로 피어난 두 개의 하트. 조금은 삐뚤었지만 따뜻했다.
기억은 바다를 건넌다.
요트 위, 항구의 노천카페, 크루즈의 갑판.
그 옆엔 언제나 민주가 있었다. 여행작가로서 그의 이름과 책은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는 글을 쓰고, 그녀는 커피를 내렸다.
커피 향은 두 사람의 언어였다.
불행은 불치병의 얼굴을 하고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혈액암 선고를 받은 민주는 반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도윤의 시간은 녹슬었다. 술과 침묵, 흐릿한 낮들.
어느 날 꿈속에서 민주가 말했다.
‘당신의 손끝으로 나를 기억해 줘.’
그 말이 그를 깨웠다.
바리스타 학원에 등록했다.
“늦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요.”
“이제 글 대신 향기로 말해보려구요.”
첫날, 에스프레소 머신의 증기가 얼굴을 덮쳤다. 손끝이 떨렸다.
‘민주라면 이 냄새를 뭐라 표현했을까?’
그는 배우고, 실수하고, 다시 배우며 하루하루를 채워갔다.
한 달 후, 첫 라떼아트를 완성했다.
조금 삐뚤었지만, 그 하트는 민주의 웃음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카페 〈하늘의 테이블〉이 문을 열었다.
유리벽 너머로 그의 손놀림이 모두 보였다.
“저게 다 보이니까, 무대 같죠?” 단골 여자손님이 말했다.
“맞아요. 제 쇼박스죠.”
그의 쇼박스 안에서, 스팀은 음악이었고, 라떼 무늬는 대사 없는 연극이었다.
하트, 꽃, 파도, 요트. 손님들의 리퀘스트마다 즉석에서 작품이 탄생했다.
“오늘은 무슨 기분이세요?”
“음… 그리움 한 스푼.”
“그럼 카푸치노에 적당하겠네요.”
커피 볶는 냄새는 복잡하고 낯설었다.
새로 일하게 된 ‘쇼박스’는 영화 포스터로 가득한 카페였다.
주인장 서 바리스타는 말했다.
“이건 단순히 커피집이 아니라 작은 무대예요.”
첫 주 내내 허둥댔다. 컵 쌓기, 머신 세척, 라떼 하트.
머릿속으론 외웠지만 손이 따라주지 않았다.
“선생님, 커피는 과학보다 감각이에요. 아직 계산하고 계시죠?”
그는 쑥스럽게 웃었다.
그날 오후, 딸이 불쑥 들어왔다.
“여기… 아빠 일하는 데야?”
“응. 그냥 도와주는 정도지.”
딸은 메뉴판을 훑었다. “그럼 아빠 커피 한 잔.”
그가 내린 에스프레소는 완벽하진 않았지만,
딸은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음… 좀 쓰다. 근데 나쁘진 않아.”
그 한마디가 커피 향보다 따뜻했다.
퇴근 무렵, 서 바리스타가 물었다.
“따님이 커피 마음에 들어 했어요?”
“모르겠어요. 그래도 다 마시더라고요.”
“그럼 성공이에요.”
집으로 돌아오며 그는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쇼박스로 와. 커피 한 잔 줄게.’
오랜만에, 누군가를 초대하고 싶었다.
다음 날, 대학 시절 친구 성준이 나타났다.
“야, 도윤! 진짜 여기서 커피를 탄다고?”
“당연하지. 인턴 아니야, 바리스타야.”
‘바리스타’라는 단어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머신의 소음과 물방울 소리 사이로
젊은 날의 장면들이 스쳤다.
국밥집에서 밤새 떠들던 날, 유럽 여행 중 길을 잃고 웃던 순간들.
그가 컵을 내밀었다.
“라떼야. 예전처럼 우유 많이 넣은 거.”
“야, 괜찮다. 이젠 커피가 여행 같네.”
“그래. 물이 지나가면서 맛을 남기잖아. 사람도 그렇고.”
잠시 침묵 후, 성준이 말했다.
“아내 얘기 들었어. 미안하다.”
“괜찮아. 이제는 내 안에 같이 사는 느낌이야.
이 쇼박스도 사실, 둘이 꿈꾸던 공간이었거든.”
“그럼 네가 하는 건 결국 둘이서 완성하는 여행이네.”
“그래. 커피 한 잔에 그녀의 시간을 불러오고, 냄새로 다시 대화하는 여행.”
어느 날, 한 노부부가 들어왔다.
“여보, 여기 커피 냄새가 참 좋네.”
“우린 예전에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죠.
그 집주인도 아내랑 함께 세계를 여행했다더군요.”
그는 라떼 두 잔을 내밀며 말했다.
“그 여행, 아직 끝나지 않았을 거예요.”
노부부는 한 모금 마시더니 눈시울을 훔쳤다.
“이 맛이야… 우리가 잃어버렸던 향.”
그날 밤, 그는 쇼박스 불을 끄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민주야, 오늘은 구름 모양이 잘 나왔어.”
그녀의 웃음이 어딘가서 들려오는 듯했다.
봄이 오자, 쇼박스는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
단골이 기타를 치며 말했다.
“이곳은 카페지만, 동시에 무대야.”
“맞아요. 제 쇼박스니까요.”
사람들은 각자의 사연을 한 잔에 담았다.
이별, 시작, 용서, 희망.
어느 날, 한 여자가 도윤이 쓴 여행 에세이집을 들고 찾아왔다.
“이 책이 제 인생을 바꿨어요. 꼭 이 커피를 마시고 싶었어요.”
그는 커피를 내리며 말했다.
“그 책은 여행 얘기지만, 이 커피는 남은 여정을 위한 겁니다.”
“민주 씨 향이 나요.”
그 말에 그는 잠시 멈칫했다.
잔 위로 피어오르는 향 속에서
오랜만에 그녀의 손길을 느꼈다.
창고 정리를 하다 먼지 낀 상자를 발견했다.
여행지의 커피 봉투와 명함들, 그리고 공책 한 권.
〈향기로 기록하는 여행일기〉.
로마.
쓸쓸한 오후엔 쌉쌀한 에스프레소.
하바나.
낯선 리듬엔 시럽 한 방울.
오사카.
너무 바쁘면, 커피도 쉬게 해 줘.
산토리니.
파란 바다엔 하얀 거품이 어울려.
마지막 장엔 눌러쓴 글씨.
“언젠가 우리가 멈추게 되면, 당신이 커피로 나를 이어줘요.”
그는 노트를 가슴에 안고 말했다.
“민주야, 당신 주문을 이제야 받네.”
그날부터 새로운 메뉴들이 태어났다.
‘Lisbon’s Morning’, ‘Kyoto After Rain’, ‘Brunei Sunset’...
그는 매일 새로운 향을 내리며 그녀의 손끝을 다시 배우고 있었다.
커피는 다시 쓰는 문장이었다.
글 대신 향으로, 추억 대신 오늘로.
국제 바리스타 챔피언십 초청장이 도착했다.
주제는 “Story in a Cup.”
그가 망설이자 단골들이 말했다.
“이번엔 무대가 아니라, 무대가 선생님을 기다리는 거예요.”
조명이 켜졌다.
그는 무대 중앙으로 걸어가 말했다.
“이건 제 아내의 레시피입니다.
그녀는 떠났지만, 저는 아직 그 여행을 계속합니다.”
스팀이 피어오르고, 라떼 위에 구름이 번졌다.
잠시 침묵 후, 숨결 같은 박수.
그건 부활의 박수였다.
그날 밤, 그는 커피 두 잔을 내렸다.
하나는 자신 앞에, 하나는 유리창 건너 빈 의자 위에.
“민주야, 오늘도 네가 제일 먼저 맛본 것 같아.”
잔을 들어 올리자 쇼박스의 조명이 하나 켜졌다.
커피 위로 빛이 내려앉았다.
그는 미소 지었다.
“좋았어, 오늘 공연.”
커피 향은 기억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도윤에게 〈쇼박스〉는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인생이 다시 오른 무대였다.
오늘도 그는 스팀피처를 돌리며 속삭인다.
“민주야, 오늘 공연도 잘했지?”
※ 이 글은 서귀포시 중문면에 거주하는 성** 바리스타 (53)의 실제 체험을 모티프로 한 다큐 픽션입니다. 그의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하되, 감정과 장면은 '글쓰기'를 위해 재구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