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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의 결승선

아마추어 러너의 철인 삼종경기 정복기

by 이에누

구름 걷힌 로스앤젤레스의 하늘이 눈이 시릴 만큼 투명하다. 한인 타운 거리. 빵 굽는 냄새와 커피 향이 섞여 흐른다.

빌딩숲 뒤편길 코너를 돌던 제임스는 신문 가판대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잔잔한 바람에 살랑거리는 지면을 눈길이 무심히 훑는다.
시선이 아래쪽 한 귀퉁이에 멎었다.
세 단짜리 작은 박스 광고 하나.

‘초보자를 위한 달리기 교실. 매주 토요일 오전 8시, 5주 과정.’

광고 카피를 읽는 순간, 마음 한켠이 묘하게 움직인다.
몸이 점점 굳어가는 걸 느끼던 때다.
“그래, 운동 좀 해야지.”
그의 혼잣말에 화답하듯, 아내가 신문을 건네받으며 웃는다.
“좋네. 나도 뭐라도 시작할까 했어.”

그렇게 두 사람의 토요일 아침이 달라졌다.
햇살이 아직 부드러운 시간, 공원 산책로에 모인 열 명 남짓한 사람들.
강사는 말이 적고 약간은 심드렁해 보였지만, 자세 하나하나를 꼼꼼히 잡아줬다.

기초 주행법, 호흡법, 자세 교정...
설명은 간단했지만, 막상 뛰기 시작하자 숨은 금세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런데 신기했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흐르는 순간, 오랜만에 ‘살아 있다’는 감각이 돌아왔다.


아내와 함께 2주 연속 수업에 참여했다. 이론과 초보자 연습이 섞인 수업은 아주 좋았다.

3주 차, 4주 차엔 비가 내렸다.

달리기 교실은 취소됐고, 그 기세는 금방이라도 식을 것 같았다.

마지막 주도 그냥 건너뛰었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 그 리듬이 남았다.

마치 미완의 문장을 다시 써야 할 것처럼, 완성되지 못한 무언가가 그를 건드렸다.




몇 달이 지나 봄으로 접어들었다.
또 다른 신문 광고가 눈에 띄었다.


한인 달리기 클럽 신입회원 모집


그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아내와 함께였다.


로스앤젤레스엔 생각보다 많은 한인 달리기 클럽이 있었다.
등산로를 걸으면 늘 한국어가 들렸고, 주말 골프장엔 한국인들이 북적였다.
운동은 이민자들에게 일종의 공동체 언어였다.


4주 달리기 교실을 마친 뒤 클럽 회원으로 가입했다. 회원만 200명.
매주 토요일이면 100명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경험 많은 리더들이 5개 그룹으로 나눠 체계적으로 훈련을 지도했다. 호루라기 소리에 다섯 개의 그룹이 각자 페이스대로 출발했다.


처음엔 숨을 헐떡이며 뒤처졌지만, 어느새 몸이 적응하기 시작했다.

거리가 늘어날수록 달리기가 주는 쾌감이 커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는 달리기를 꽤 잘할지도 모르겠는데?’


그해 여름, 하프 마라톤에 참가했다.
2시간 만에 완주.


결승선을 통과하던 순간, 성취감보다 먼저 찾아온 건 안도감이었다.
‘아, 해냈구나. 나는 아직 살아 있구나.’

그리고 10개월 만에 첫 풀마라톤을 완주했고, 연습을 이어가며 몸 상태는 점점 좋아졌다.
기록은 평범했지만, 완주는 완주였다.
그때부터였다.
더 먼 곳을 바라보기 시작한 건.




보스턴 마라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회, 모든 아마추어 러너들의 꿈의 무대.
하지만 아무나 뛸 수 없다.
BQ(Boston Qualifying Time) 참가 자격을 통과해야 했다.

그의 연령대 기준은 3시간 35분.
2013년 2월, 헌팅턴비치 마라톤에서 그는 3시간 33분에 골인했다.
단 2분의 여유.
하지만 그 2분이 인생을 바꿨다.

일 년 내내 보스턴 출전을 한참 준비하던 때.

눈앞에 다가온 집안 행사가 잠깐 발목을 잡았다.
다시 1년을 준비해 2015년, 마침내 보스턴의 거리를 달렸다. 2025년 2월까지 총 약 40회의 공식 마라톤을 완주했다.


4월의 바람이 차가웠고, 환호는 뜨거웠다.
수만 명의 러너들 틈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들었다.
“제임스! 고!”
낯선 관중의 외침이었다.
그 한마디가 낯선 도시에서 그를 무너뜨렸다.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터졌다.
그날, 이민자의 이름은 하나의 응원이 되었다.

보스턴 이후, 달리기는 더 이상 운동이 아니었다.
삶의 리듬이자, 하루를 여는 의식이 되었다.


그런 어느 날, 클럽의 윤 코치가 다가왔다.
두 살 어린 후배, 누구보다 열정적인 남자였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형님, 삼종경기 한 번 해보실래요?”
“그게 뭔데?”
“수영하고 자전거 타고 달리기 다 하는 거요. Iron man race라고.”
그는 피식 웃었다.
“그걸 내가 할 수 있을까?”
“물에서 안 죽을 정도로만 수영하시면 됩니다.”

그날 저녁,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나, 삼종경기 한 번 해볼까?”
아내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당신이라면 할 거 같아.”




삼종경기(Full distance)는 수영 3.8km, 자전거 180km, 달리기 42.2km로 결코 만만치 않다. ‘Iron man’은 브랜드 대회명이며, 비(非) 브랜드 대회와는 엄정하게 구분된다. 그만큼 이 경기는 단순한 ‘도전’이 아니라 체계와 생태계 속에서의 엄혹한 '생존'임을 말해준다.

첫 대회는 팜스프링스였다.
새벽 공기는 싸늘했고, 호수 위엔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다.
발끝이 물에 닿는 순간, 얼음처럼 차가운 감각이 온몸을 덮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앞뒤에서 팔이 부딪치고, 물보라가 눈과 입을 덮쳤다.


공황이 왔다.
그는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걸 한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고작 5분 만에 끝나는 건가.’
숨을 고르며 얕은 곳으로 나왔지만, 한참 후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느꼈다.
달리기든 인생이든, 결국엔 다시 들어가야 끝이 난다는 걸.


제임스의 삼종경기 풀코스 참가는 2014년 겨울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올해까지 9개의 대회에 참가했다.
1. 2014 California Santa Rosa 대회
2. 2015 California Santa Rosa 대회
3. 2015 Arizona Tempe 대회
4. 2016 Arizona Tempe 대회
5. 2017 Florida Panama City 대회
6. 2018 Arizona Tempe 대회
7. 2019 Arizona Tempe 대회
8. 2022 California Sacramento 대회
9. 2025 California Sacramento 대회


자전거를 직접 가져가야 하는 제약 때문에 대회 장소 선택과 이동, 비행기 운송·운송업체 이용 같은 현실적 에피소드가 무수하게 발생했다.


자전거를 들고 비행기에 오를 때마다 매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페달을 분리해 포장하고, 목적지 공항에서 다시 조립하는 일은 작은 의식처럼 반복됐다.


그는 완주했다.
수영, 자전거, 달리기.
모두 끝내고 찍힌 사진 속에서 그는 젖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뒤엔 세 명의 선수가 더 있었다.
그건 ‘꼴찌의 미소’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표정’이었다.

그 후 아홉 번의 철인경기를 완주했다.
플로리다, 애리조나, 새크라멘토.
자전거를 직접 들고 비행기에 오르며 사람들은 물었다.
“힘들지 않아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힘들죠. 근데 그게 좋아요.”




2023년.

클럽에서 같이 운동하던 74세 지선배가 네 번째 도전 끝에 완주했다.
그는 결승선을 통과하는 선배를 보며 울컥했다.
‘이 나이에도 해낼 수 있구나.’

그해 여름,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2024년 자전거 연습 중 고관절 통증으로 연기 신청을 했다.


다음 해 들어 훈련을 재개하던 중 7월 초 자전거 사고로 갈비뼈에 금이 갔다. 한 달 반 안정 후 훈련을 재개해 10월 19일 새크라멘토 대회에서 완주했다. 기록은 대단치 않았지만, 그 나이에 완주한 스스로가 대견했다.
고관절 통증과 골절, 쉼 없는 회복의 시간.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2025년 10월 19일, 새크라멘토.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 됐다.”
그건 누구에게 보이려는 미소가 아니라, 자신에게 건넨 미소였다.


등에 붙은 번호표는 땀에 젖어 구겨졌지만, 숫자는 또렷했다.
그의 나이, 그가 달려온 시간, 그가 이겨낸 세월이 거기 있었다.




지금도 그는 새벽마다 달린다.
도심의 불빛이 꺼지기 직전, 회색빛 하늘 아래를 조용히 걷듯 달린다.
예전처럼 기록을 재지 않는다.
이제는 페이스보다 ‘리듬’이 중요하다.
호흡이 깊어지고, 발끝이 바닥을 스칠 때마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음을 느낀다.

가끔은 발걸음을 멈춘다.
멀리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번지고, 벤치 위로 새벽안개가 내려앉는다.
그 순간 그는 생각한다.
‘결승선이란 결국, 또 다른 출발선이었구나.’

그의 달리기는 이제 기록에 매달리지 않는다. 기억으로 달리고 있다.
매일의 아침, 짧은 러닝, 그리고 함께 달렸던 얼굴들.
시간이 흘러도, 그 리듬은 몸 안 어딘가에서 여전히 박동한다.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쉰다.

미세한 미소를 짓는다.
오늘도 달릴 수 있어서,
아직은 결승선 너머의 풍경을 볼 수 있어서.

그 모든 시작은, 신문 하단의 작은 박스광고 카피 한 줄이었다.

"한인 달리기 클럽 신입회원 모집"


아이언맨 제임스 문(James Moon)의 결승선.

그 곳은 피니시 라인이 아니라, 다른 질주를 향한 스타트 라인이다.





※ 이 글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한인교포 문** (67)의 실제 체험을 모티프로 한 논픽션 에세이입니다. 그의 기록과 기억을 바탕으로 하되, 감정과 장면은 '글쓰기'를 위해 재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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