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범들의 아침 1.

《쇼닥터》 1화

by 이에누

다섯시 오십 분.
도시는 아직 잠들어 있다. 방송국만이 깨어 있다.

한성준은 방송국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엔진을 끄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계기판 불빛만이 차 안을 희미하게 밝혔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건물의 불빛은 수술실처럼 차갑고 균질했다.
이 시간에 아픈 사람은 없다.
하지만 팔아야 할 병은 있다.

그는 차 안에서 흰 가운을 입었다.
이제 가운은 보호복이 아니라 유니폼이었다.
사람을 살리는 옷이 아니라, 신뢰를 파는 옷.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거울 속에 자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 밑은 짙게 꺼져 있었고, 입가에는 설명해야 하는 사람 특유의 미소가 굳어 있었다.

피곤해 보였지만, 지친 의사의 얼굴은 아니었다.
무언가 변명해야 할 사람의 얼굴이었다.

스튜디오 문을 열자 조명 열기와 분주한 발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오전 여섯 시, 생방송 한시간 전.

“교수님, 오늘 주제는 혈관입니다.”

PD가 큐시트를 건넸다.
톤은 담담했지만 결연한 목소리였다.

혈관, 관절, 장, 면역력.
이 네 개는 언제나 잘 팔렸다.

성준은 큐시트를 펼쳤다.
첫 장에는 의학 논문이 아니라, 숫자와 그래프가 빼곡했다.

중장년층 심혈관 관련 검색량 증가: 31.7%
“혈관 건강” 키워드 SNS 언급량: 전주 대비 28% 상승
관련 제품 구매 전환율 예상치: 19.4%

그리고 빨간 글씨로 표시된 문장.

불안 유발 포인트: 숨 가쁨, 가슴 답답함, 손발 저림

의학적 증상이라기보다, 심리를 겨냥한 문장이었다.

“교수님, 오늘 톤은 조금만 더 긴박하게 가죠.”

쇼호스트 박지연이 환하게 웃었다.
카메라 앞에서 만큼이나 정확한 미소였다.

“어느 정도까지요?”

성준이 묻자, 그녀는 대답 대신 모니터를 가리켰다.
화면에는 굵은 글씨 세 단어가 떠 있었다.

공포 → 해결 → 결제

“요즘 시청자들, 그냥 설명하면 안 사요.
불안해야 사죠. 물론 겁만 주면 안 되고요.
반드시 출구가 있어야죠.”

출구.

그 단어가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도망칠 수 있는 문이 아니라, 지갑으로 이어지는 문.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5, 4, 3…”

조명이 켜지고, 카메라가 돌아갔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도 건강 지킴이, 박지연입니다.”

밝고 안정적인 쇼호스트의 목소리.
아침 공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활력.

“요즘 혹시 이런 증상 없으세요?
계단 오를 때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하고,
손발이 자주 저린다든지.”

카메라가 성준을 비췄다.

“사실 이런 증상들, 대부분 그냥 넘기죠.
‘나이 들어서 그렇겠지’,
‘피곤해서 그렇겠지’ 하고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냥 넘기면 안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혈관은 어느 날 갑자기 막히지 않습니다.
조용히, 천천히, 그리고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됩니다.”

모니터에는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된 혈관이 서서히 좁아지는 장면이 재생됐다.
붉은 혈액이 끈적하게 막히는 그래픽.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어느 날 갑자기 심근경색, 뇌졸중으로 쓰러질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이 문장을 수백 번 말해왔다.
의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실의 비중은 점점 줄고,
공포의 농도만 진해 지고 있었다.

“그래서 중요한 게, 지금 관리입니다.”

지연이 자연스럽게 제품 쪽으로 몸을 틀었다.

“교수님, 이 제품 임상 데이터 직접 검증하셨죠?”

성준은 준비된 대답을 내놓았다.

“네. 혈관 내 염증 지표가 평균 17% 감소했고,
LDL 콜레스테롤 수치 역시 유의미하게 낮아졌습니다.”

진실.
그러나 말하지 않은 진실도 있었다.

연구 대상자 수는 48명.
대조군은 없었다.
연구비는 제조사가 전액 지원했다.

방송은 정확히 계획된 궤도를 따라 흘러갔다.
불안 – 경고 – 해결 – 안도.

마지막 멘트.

“지금 관리하지 않으면 늦습니다.”

전화벨 소리가 폭발하듯 터졌다.

방송이 끝나자 스튜디오는 순식간에 식었다.
조명이 꺼지고,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아졌다.
누군가는 커피를 찾았고, 누군가는 소파에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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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회사 제일기획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했고 지금은 여러 매체에 기고하면서 강의도 하고 있습니다. 이 글들은 일과 놀이,체험과 생각들의 틈새 세상참견이고 생존 보고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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