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정, 그리고 후배 김길리
링크는 조용하다.
아니, 시끄럽다.
하지만 내 귀엔 날이 얼음에 긁히는 소리만 남는다.
슥, 슥, 슥.
호흡은 일정하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기다린다.
나는 안다.
지금 위치, 4위.
이 자리는 불안해 보이지만 가장 안전한 자리다.
바깥에서 흐름을 읽고, 안쪽 틈을 계산한다.
나는 두 번이나 올림픽 1500m를 이겼다.
내 몸은 안다.
언제 들어가야 하는지.
“지금이다.”
아웃코스로 몸을 던진다.
빙판이 순간 기울어진다.
한 명, 두 명.
숨이 길어진다.
이 길의 끝에는 3연패가 있다.
평창.
베이징.
그리고 밀라노.
내 이름 옆에 ‘전인미답’이라는 단어가 붙는 순간.
나는 그 장면을 상상하지 않은 적이 없다.
두 바퀴.
바로 그때, 오른쪽 뒤에서 기류가 바뀐다.
빠르다.
길리다.
후배의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찢고 들어온다.
젊은 속도.
망설임 없는 직선.
“좋다.”
나는 순간적으로 계산한다.
인코스.
틈은 있다.
몸을 더 낮추면, 한 번 더 밀어 넣으면, 다시 선두를 가져올 수 있다.
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런데 동시에 다른 장면이 스친다.
훈련장에서,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로
“언니, 어떻게 그렇게 마지막에 힘이 남아요?”
웃으며 묻던 얼굴.
시합 전날,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아
손을 꼼지락거리던 그 긴장.
나는 안다.
이 아이가 얼마나 준비했는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인코스로 파고들면
몸이 부딪힐 수도 있다.
작은 충돌 하나면
둘 다 무너질 수도 있다.
나는 다시 계산한다.
지금, 내가 다시 앞에 서면
금은 내 것이다.
역사는 내 것이다.
하지만 길리는?
혹시 엉키면?
혹시 넘어지면?
한국 쇼트트랙은 늘 강했다.
하지만 강함은 누군가가 길을 내줄 때 이어진다.
나는 아주 미세하게 라인을 조정한다.
완전히 비켜주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무리하지도 않는다.
대신 뒤를 본다.
쫓아오는 선수들.
거칠게 밀려오는 외국 선수의 어깨.
나는 속도를 유지한 채, 길목을 잠근다.
“가라.”
말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분명히 말한다.
가라, 길리야.
결승선이 칼날에 찢어진다.
1위.
김길리.
그 바로 뒤, 나.
은메달.
숨이 거칠다.
가슴이 뜨겁다.
아쉬움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3연패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선수로서 욕심이 왜 없겠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후회는 없다.
길리가 나를 안고 운다.
나는 등을 토닥인다.
“잘했어.”
그 한마디 안에
내 0.3초의 선택이 다 들어 있다.
나는 이미 두 번 이 종목의 올림픽 챔피언이었다.
최민정.
그리고 오늘, 나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남는다.
금메달을 딴 것은
김길리.
하지만 그 순간 링크 위에서
나는 한 세대의 끝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시작을 밀어냈다.
챔피언은 가장 빨리 들어오는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가장 오래 남을 선택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빙판은 금빛으로 반짝였지만
내 가슴에 남은 색은 은빛이었다.
그리고 나는 안다.
오늘 내가 지켜낸 것은
메달 하나가 아니라
한국 쇼트트랙의 시간이었다.
밀라노의 1,500미터 쇼트트랙 결승선에서 최민정은 후배 김길리에 이어 2등이었다. 그가 놓친 것은 금메달이었지만 그 자리에는 진짜 챔피언의 품격이 빛나고 있었다.
최민정의 시점에서 긴박한 레이싱의 순간을 재구성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