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의 선택

《쇼닥터》 13화

by 이에누

세린은 선택해야 했다. 침묵할 것인가, 말할 것인가?

연구소는 이미 밤이었다. 세린은 그날 밤 연구소에 혼자 남아 있었다. 건물은 이미 대부분 불이 꺼져 있었다. 서버실에서 돌아가는 냉각팬 소리만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로그 기록이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접속 기록. 파일 접근 기록. 데이터 이동 기록.

그녀는 이미 이 기록을 세 번이나 확인했다. 그리고 매번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한성준. 외부 접속 기록은 그의 계정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접속 시간도 어색했고 파일 접근 순서도 맞지 않았다. 성준은 데이터를 다루는 사람이 아니었다. 임상 자료를 꺼내는 방식도 이런 식일 리 없었다.


세린은 커서를 천천히 움직였다. 로그 하나를 다시 열었다. 그리고 멈췄다.

IP 주소. 병원 내부망. 정확히 말하면 임상시험센터 내부 단말기.


그녀의 책상 위에는 두 개의 파일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공식 보고서.

“혈관 건강 기능 제품, 임상 결과 유의미한 개선 확인.”

깔끔한 그래프. 정리된 통계. 논문 형식으로 다듬어진 문장들. 문제는 그 데이터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옆에는 다른 파일이 있었다. 복구된 로그에서 찾아낸 삭제된 원본 데이터. 그 파일에는 다른 문장이 있었다.

“효과 없음.”

“일부 환자에서 부작용 관찰.”


그래프도 달랐다. 세린은 한참 동안 두 파일을 번갈아 보았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숫자를 어떻게 보여주느냐는 언제나 선택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 선택은 언제나 누군가의 삶을 바꾼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린은 그 순간 한 이름을 떠올렸다. 윤태진. 그녀는 다시 로그를 뒤졌다.

접속 시간. 파일 접근 순서. 삭제된 기록.

그 순간 세린은 깨달았다. 누군가 로그를 지우려 했다.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꽤 정교하게.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개의 흔적이 남았다. 관리자 권한 접근.

그 권한을 가진 사람은 연구소에 몇 명 없었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세린 자신이었다.


그녀는 의자에 기대 앉았다. 갑자기 숨이 조금 가빠졌다. 머릿속에서 사건들이 빠르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병원 앞 약국. 윤미경. 세프바이오. 윤태진의 제보. 그리고 한성준.


그날 밤 통화가 떠올랐다.

“…너야?”

그리고 성준의 대답.

“이 시스템에서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잖아.”

그때 그녀는 그 말을 사실상의 인정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세린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니었네…”

그는 인정한 게 아니었다. 받아들인 것이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고 이미 밀려난 사람이 가장 적당하다는 것을.


그녀는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병원 건물이 어둠 속에서 떠 있었다. 불이 몇 개 켜져 있었다. 아마 병원장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무장은 내일 회의 자료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고 윤미경은 약국 문을 닫고 집에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윤태진도 숨죽이고 있을 것이다. 그는 시스템을 건드렸고 그 대가로 이미 사라진 사람이었다.


다음 날 병원에서는 징계가 공식 발표됐다.

한성준. 연구 정지. 대외 활동 중단.

그리고 또 한 명. 윤태진. 무단 자료 반출 및 내부 규정 위반. 징계와 동시에 형사 고소.


윤미경의 명예훼손 사건은 이미 법률 사무소로 넘어가 있었다. 병원은 공식 입장을 냈다.

“개인적 일탈 행위이며 병원과는 무관합니다.”

완벽한 문장이었다. 병원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문장. 세린은 그 문장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갑자기 웃었다. 아주 짧게.


그녀는 이제 구조를 이해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제보했고 누군가는 고소했고 누군가는 책임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병원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 밤 세린은 다시 서버에 접속했다. 이번에는 연구소 계정이 아니라 관리자 권한으로. 로그 파일 하나를 복구했다. 지워진 기록의 일부가 돌아왔다.

접속 계정. 접속 단말기. 파일 전송 경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파일 이름.

세린은 그 이름을 보고 손을 멈췄다.

Prescription_flow_analysis.xlsx

처방 흐름 분석. 윤태진이 만들었을 것이다.


세린은 파일을 열었다. 그래프가 하나 나타났다. 특정 약의 처방이 특정 약국으로 집중되는 흐름. 그리고 그 약의 이름. 세프바이오 신약. 세린은 모니터를 한참 바라봤다. 이건 단순한 의혹이 아니었다. 패턴이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세린은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김세린 연구원 맞습니까?”

“누구세요?”

상대는 짧게 말했다.

“윤태진입니다.”

세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윤태진이 말했다.

“한성준 교수님… 징계 받았죠.”

“……”

“제가 한 일입니다.”

세린은 천천히 물었다.

“왜 교수님 계정을 썼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제가 쓴 게 아닙니다.”

“그럼?”

윤태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누군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세린의 손이 조금 떨렸다.

“누가요?”

윤태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연락한 겁니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한 문장.

“이제 누군가 내부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전화가 끊겼다. 세린은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연구소 창밖으로 병원 주변 건물이 보였다. 불이 몇 개 켜져 있었다. 그 건물 안에는 병원장도 있고 제약회사 사람도 있고 윤미경도 있다. 그리고 한성준도 있었다. 아마 지금쯤 모든 걸 포기한 채.


세린은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로그 파일. 처방 패턴.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메시지 하나.

발신자: 한성준

세린은 잠시 멈췄다. 메시지를 열었다.

“자료 줄게.”

단 한 줄. 그녀는 잠시 웃었다.

이 사람은 끝까지 자기가 책임질 생각이었다. 성준은 답장을 보내지 못했었다. 자료를 받는 순간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돌아갈 길은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그날 밤 연구소 서버에서 파일 하나가 외부로 전송됐다.

경로는 익명 네트워크였다. 보낸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록되지 않는 방식. 파일 이름은 짧았다.

trial_original_data.zip


며칠 뒤 인터넷에 익명 게시글 하나가 올라왔다. 제목은 단순했다.

“건강기능식품 임상 데이터 조작 — 실제 내부 자료 공개”

게시글에는 설명이 거의 없었다. 대신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래프. 논문 초안. 삭제된 수치. 그리고 처방 흐름을 보여주는 데이터. 누군가가 아주 조용하게 그리고 아주 정확하게 자료를 정리해 놓은 파일이었다.


폭발은 생각보다 빨랐다. 방송사에서는 긴급 회의가 열렸다. 회의실 안은 평소보다 훨씬 조용했다.PD가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이거… 우리 프로그램에서 소개했던 제품이죠.”

누군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잠시 정적. 그리고 누군가가 말했다.

“이거 우리랑 상관없는 일로 만들어야 합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

“그럼 누가 책임지죠?”

잠시 침묵.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한성준.


세프바이오는 바로 움직였다. 긴급 기자회견.

서정훈이 단상에 섰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였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일부 자료가 온라인에 유출되며 소비자 여러분께 혼란을 드린 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덧붙였다.

“일부 전문가의 과장된 해석이 상황을 왜곡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말은 사과가 아니었다. 방향 설정이었다.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로 흘러가야 하는지 미리 정해 주는 문장.


그날 밤 성준의 집 앞에는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카메라. 마이크. 휴대폰. 누군가 소리쳤다.

“교수님!”

“자료 유출 사실 인정하십니까?”

다른 기자가 물었다.

“제약사와 결탁한 것 아닙니까?”

또 다른 질문이 이어졌다.

“임상 데이터 조작에 관여하신 겁니까?”

성준은 잠시 서 있었다. 그 질문들은 모두 방향이 뒤집혀 있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누가 이야기의 악역이 될 것인가? 그게 더 중요했다. 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메시지 하나. 발신자: 김세린

짧은 문장이었다.

“이제 시작이야.”

성준은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