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이 귓속에서 속삭였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장면이 있다. 도서관 근처 편의점 전자레인지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도시락 하나를 들고 전자레인지 앞에 서 있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나오면 늘 들르는 편의점이다. 익숙한 동선이다.
도시락을 넣고 3분 버튼을 눌렀다.
‘땡.’
끝났다는 신호다. 문을 열고 도시락을 꺼냈다.
그런데 이상했다. 미지근했다. 도시락은 따끈해야 제맛 아닌가? 다시 넣고 1분을 더 돌렸다.
‘땡.’
꺼냈다. 여전히 미지근했다. 나는 잠깐 도시락을 들고 서 있었다.
전자레인지를 한 번 노려봤다. 다시 넣었다. 또 꺼냈다. 도시락은 몇 번이나 전자레인지 안을 들락거렸다. 전자레인지는 묵묵히 돌아갔지만 도시락은 좀처럼 뜨거워질 생각이 없었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요즘 기계들이 왜 이래…”
계산대 쪽을 힐끗 봤다. 아르바이트 학생이 앉아 있었다. 아마 휴대폰 화면에 빠져 있는 듯했다. 나는 전자레인지 앞에서 말했다.
“저기요.”
대답이 없었다. 조금 더 크게 말했다.
“저기요!”
학생은 여전히 가만히 서 있었다. 이번에는 꽤 큰 목소리였다.
“저기요!”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이쯤 되면 묘한 기분이 든다. 무시당하는 느낌이랄까. 슬며시 화가 올라왔다. 요즘 아이들 버르장머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은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것 같고, 나는 괜히 더 목소리를 높이고 싶어졌다. 잠깐의 신경전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카운터로 갔다.
“학생.”
그제야 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귀에서 뭔가를 슬쩍 빼냈다. 이어폰이었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 아. 소통을 가로막고 있던 녀석의 정체가 밝혀졌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음악을 듣고 있었을 수도 있다. 시험공부를 하다가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강의를 들으며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손님이 없을 때 이어폰을 끼고 있는 학생을 이해하는 것. 어쩌면 그게 어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몰라서 그랬고, 알면서도 참지 못했다. 괜한 말을 한마디 덧붙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한심한 행동이었다.
집에 돌아와서야 알았다. 전자레인지 문제는 기계가 아니었다. 내 눈이었다. 조리 버튼을 누른다는 게 해동 버튼을 눌러 놓고 몇 번이나 꺼냈다 넣었다 했으니 도시락이 제대로 데워질 리가 없었다. 나는 멀쩡한 전자레인지만 의심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다. 키오스크 앞에서 버벅거리고, 전자제품 앞에서 괜히 노인 티를 내고, 스마트폰 화면을 잘못 눌러 글을 쓰다 흐름이 툭툭 끊기기도 한다. 며칠 전에도 이 글을 쓰다가 몇 번이나 버튼을 잘못 눌렀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나도 알바를 해 본 적이 있다.
정년퇴임 후 마냥 백수로 지내기 뭐해서 주차관리 요원을 할 때도 있었고, 도서관 사서보조를 할 때도 있었다. 그때 나도 가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 손님이 없을 때라고 생각했지만 혹시 누군가 나를 불렀는데 음악 때문에 못 들은 적이 없다고는 장담 못하겠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 편의점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날 밤이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다가 잠깐 음악이 멈춘 순간, 귀 속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나는 깜짝 놀랐다.
“누구야?”
차분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접니다. 이어폰입니다.”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이어폰이 조용히 말했다.
“며칠 전 편의점 기억하시죠?”
나는 괜히 변명했다.
“나는 그걸 몰랐어.”
이어폰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럴 수 있죠.”
그리고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요.”
“뭐가?”
“그날 노이즈 캔슬링이 필요했던 사람은
그 학생이었을까요…”
잠깐 말을 멈추더니 덧붙였다.
“아니면 선생님이었을까요?”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낯익은 기계음이 끼어들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전자레인지였다.
“선생님이 누른 건 조리 버튼이 아니라 해동 버튼이었습니다.”
잠깐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저는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요즘 저희 전자제품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기능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나는 물었다.
“무슨 기능?”
전자레인지가 말했다.
“노이즈 캔슬링 말고요.”
잠깐 침묵이 흐른 뒤
전자레인지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꼰대 캔슬링 기능이요.”
꼰대 캔슬링!
요즘 내가 가장 필요하다고 느끼는 기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