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룸에 갇힌 사랑

구소은, 《파란 방》을 읽다 떠올린 생각

by 이에누

구소은의 소설 《파란 방》을 다시 펼쳤다. 오래전 읽었던 책이었는데, 개정판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문득 그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도 어떤 책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다시 읽히는 순간이 온다. 그때의 나는 그 책을 다 읽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처럼.


속표지의 작가 소개를 읽다가 잠깐 멈췄다. 프랑스에서 광고를 공부했고, 귀국 후 광고회사에서 일했다는 이력. 낯설지 않았다. 문장이 아니라 기억처럼 읽혔다. 한때 비슷한 공간에 몸을 두었던 사람만이 느끼는, 묘한 기시감 같은 것.

첫 장편 《검은 모레》로 제주4.3 평화문학상을 받았던 작가가 쓴 작품이라고 하기엔, 《파란 방》은 결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이번 독서는 처음보다 더 깊이 들어갔다. 단순히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자가 아니라, 문장과 시선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보는 쪽에 가까웠다.


소설을 읽는 일은 결국 타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런데 어떤 소설은 ‘들어간다’는 표현으로 부족하다. 어느 순간 나는 이 작품을 읽고 있다기보다, 그 안으로 스며들어가고 있다는 감각에 사로잡혔다. 조금 과장하면, ‘침입’에 가까웠다. 책머리에 적힌 작가의 문장이 그 감각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작가란 경험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통해 경험하는 사람이다.”


이 문장을 곱씹다 보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따라온다. 정말 그럴까? 소설 속 장면들은 지나치게 구체적이다. 감각은 살아 있고, 시선은 흔들림이 없다. 몸을 묘사하는 문장은 단순한 외형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처럼 펼쳐진다. 그 풍경 안에서 감정이 움직이고, 욕망이 서사를 만든다.


그래서 오히려 낯설어진다. 이건 경험일까, 아니면 상상일까? 그 질문은 곧 무너진다. 중요한 건 경험의 출처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생생하게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느냐이기 때문이다. 쓰는 순간 그것이 경험이 되어버리는 상태. 아마도 소설이 가진 힘은 바로 그 지점에 있는 것 같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품들이 있다. D. H. Lawrence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 그리고 Paulo Coelho의 《11분》. 이 작품들이 다루는 것은 단순한 자극이 아니라, 욕망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파란 방》 역시 그 흐름 어디쯤에 닿아 있다.


읽는 내내 한 장면이 자꾸 겹쳐졌다. 광고회사 시절,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진행하던 방. 원웨이 미러 너머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시간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순간, 오히려 더 솔직해진다. 이 소설을 읽는 경험이 바로 그와 닮아 있다.

성 경험이 있는 둘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지가 꼴리면 다 생략하고 바로 껄떡거리는 놈들은 딱 질색이야. 사정할 때쯤 여자는 막 달아오르기 시작하는데 말야. 그러곤 끝. 얼마나 허무한지 아니?”
“그러게 말야. 성감대를 먼저 진득하게 자극해 줘야지 달콤한 섹스의 서막이 열리거든. 지스팟이 있네 없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냐. 아직 젖기도 전에 남자애가 지스팟을 자극해 주겠다며 손가락으로 마구 휘저으면 짜증이 확 나서 섹스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니까. 여자의 몸 여기저기에 성감대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일일이 다 말해 줄 수도 없고.”

나는 화자의 시선을 빌려 인물들의 가장 내밀한 순간을 바라본다. 그들은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 심지어 작가조차 이 시선을 계산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은 하나의 ‘미러룸’처럼 작동한다. 먼저 들여다본 것은 작가다. 그 작가를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독자다.

샤워 가운을 벗고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예뻤다. 오목한 밥공기를 엎어 놓은 것 같은 탱글탱글한 젖가슴이 이날따라 더 봉긋해 보였다. 연갈색 젖꽃판 위에 살포시 앉아 있는 유두는 야리아리하게 익어 가는 버찌를 연상시켰다.
깊은 숨을 들이마시면 드러나는 갈비뼈 아래의 완만한 협곡, 거기를 따라 내려가면 새치름한 옹달샘이 나왔다. 몇 번의 여름, 피어싱을 해 보려던 유혹을 번번이 이겨 낸 깊지도 돌출하지도 않은 배꼽이었다. 바람이 휩쓸고 간 흔적이라고는 없는 잘 다져진 사막 같은 아랫배.
그 아래로 시선이 미끄러져 내려간 곳 끝에는 보드라우면서도 까슬까슬한 덤불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풀숲을 이뤘다. 그곳은 은밀한 세상의 입구를 가려 주는 나지막한 언덕이었다. 그 언덕을 사람들은 불두덩이라 불렀다.

그 이중의 시선 속에서 묘한 긴장이 생긴다. 읽는 행위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어떤 은밀한 참여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문학이 때때로 건드리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나의 감각이다.

나는 전신 거울 앞으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서서히 힘을 풀고 다리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벌렸다. 수풀 사이로 도톰한 입술이 벌어졌다. 비밀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갯가에 떠밀려 온 신선한 해초와 선홍빛으로 곱게 핀 해당화 향기가 은은하게 어우러진 보물섬, 그 속에 숨어 있던 작고 은밀한 문이 열린다. 사전에서는 비밀의 문을 음문 또는 옥문이라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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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막 밑에서 옥문의 입구까지는 달팽이 점액을 도포한 듯 말캉하고 촉촉한 연체동물의 표피 같다. 긴장을 다 풀지 못한 허벅지의 힘을 빼고 무릎의 폭을 더 넓혀 본다. 옥문이 배꼽처럼 열렸다. 알리바바가 없어도, 열려라 참깨를 외치지 않아도 열리는 비밀의 문이지만, 지금까지는 들고난 사람이 없었다. 윤조차도 다가서지 않았던 문, 거기엔 오로지 나뿐이었다.

문학은 종종 나르시시즘의 경계에 서 있다. 타인의 이야기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억눌린 감정이나 욕망을 우회적으로 경험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것은 단순한 자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것들을 끌어올리고, 흘려보내는 쪽에 가깝다. 《파란 방》의 문장들이 그렇다. 읽고 나면 무엇을 읽었는지보다, 무엇이 흔들렸는지가 더 또렷하게 남는다.


그래서 이 소설을 단순히 자극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딘가 어긋난다. 이 작품은 욕망을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욕망을 통과해 인간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어딘가 어긋나 있고 불완전한 관계들이다. 불온하고, 불균형하며, 때로는 기형적인 감정의 형태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거둘 수 없는 이유는, 그 안에 우리가 외면해 왔던 어떤 진실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모리스 블랑쇼는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지만,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해야 하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라고 했다. 이 소설은 바로 그 모순된 자리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결국 나는 그 방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이다. 안으로 들어가지도, 완전히 돌아서지도 못한 채.

파란 빛이 어른거리는 그 공간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는 사람.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