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지운 욕, 내가 기억한 이름
나는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어느 날은 집에 있었고, 또 어떤 날은 며칠씩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에 오는 날이면, 엄마는 울며불며 매달려야만 했다.
나는 그런 날이면 아지트로 도망치거나, 그럴 여유도 없으면 벽과 장롱 사이 틈새로 숨어들었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엄마의 울음, 아버지의 욕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그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귀를 때리면,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소리들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그 틈새에만 들어가면 코피가 났다.
그냥 조금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퉁퉁 부은 얼굴,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인 엄마에게 코피가 난다고 말했다.
그러면 엄마는 얼른 휴지를 들어 내 코를 막고, 나를 바닥에 눕혔다.
다독이는 엄마의 손길, 괜찮냐고 묻는 목소리가 좋았다.
그래서 코피가 나는 게 무섭지 않았다.
아버지는 종종 나보다 두 살 어린 동생만 데리고 외박을 했다.
돌아오면 동생은 "예쁜 언니 집에 갔다."라고 말했다.
그날의 동생은 기분이 좋아 보였고, 맛있는 걸 많이 먹었다며 자랑했다.
아버지는 나를 한 번도 데려간 적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동생이 부러웠다.
내가 그렇게 가보고 싶었던 언니 집에 처음 간 날은,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 손에 이끌려서였다. 분 냄새가 많이 나던 여자는 엄마와 달리 시퍼렇게 바른 눈두덩이와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고, 엄마보다 젊었다. 엄마는 동생이 언니라고 부른 그 여자 앞에 다짜고짜 무릎을 꿇은 채 사정했다. 나는 엄마 옆에 멀뚱히 서서 열린 문 너머로 그 여자의 방을 둘러보았다. 우리 집과는 달리 여자의 방은 밝았다. 우리 집에는 없던 화장대도 있었고, 커튼이 달린 창문도 있었다. 내 시선이 여자의 화사한 방 안에 머무는 동안, 엄마는 울며불며 여자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한 번만 살려달라며, 애를 아빠 없이 키우고 싶지 않으니 남편을 놔 달라며 나를 그 여자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엄마를 따라 울었다. 여자는 시끄럽다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화냥년.”
엄마의 말에 여자가 발끈했다. 고성이 오가고 있을 때, 아버지가 그 여자 집으로 왔다. 아버지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엄마와 나를 밀치고는, 그 여자 옆에 서서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며 머리채를 잡았다. 나는 아버지의 손에서 엄마의 머리카락을 빼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의 다른 손이 곧장 엄마의 얼굴로 날아왔다. 엄마는 뒤로 나뒹굴었다. 엄마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나는 여자의 집을 뛰쳐나왔다. 낼 수 있는 전속력으로 집으로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새시문이 열려 있는 영은이네 집으로 들어섰다.
깨끗하게 닦인 방바닥에 앉은 아줌마가 영은이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잔뜩 땀을 흘린 채로 나는 아저씨를 불러댔다.
아줌마는 다른 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아저씨를 깨웠다.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고 있다는 내 말을 들은 아저씨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느릿하게 옷걸이에 걸린 잠바를 입었다. 나는 아저씨가 빨리 신을 수 있도록 신발을 가지런히 앞에 두었다.
“갔다 올게.”
아저씨의 짤막한 말에 아줌마는 한숨을 내쉬며 작게 내뱉었다.
“하필 오늘 하루 쉬는 날, 네 아버지도 참. 네 엄마는 거길 왜 가니. 무슨 좋은 꼴 보려고.”
나는 뒤에서 들리는 아줌마의 말을 듣지 못한 척했다. 영은이는 구경거리가 난양 아저씨를 따라나서려는 걸 아줌마와 아저씨가 말렸다. 영은이가 입을 삐죽이며 아저씨를 따라가겠다고 울어댔다. 나는 얼른 아저씨가 아버지에게 가서, 엄마가 조금이라도 덜 맞았으면 했는데 울어대는 영은이가 얄미웠다.
한바탕 난리가 난 여자의 집 앞엔 동네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아저씨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엄마는 이미 아버지에게 많이 맞아 머리채는 산발이 되었고, 옷도 엉망이었다. 여자는 엄마를 가리키며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다시는 자길 볼 생각하지 말라며 아버지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아버지는 집에서는 볼 수 없던 모습으로 여자를 달랬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 나와 엄마는 아저씨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엄마는 한참을 마당에 앉아 울다가 씩씩거렸다. 그러곤 나를 보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느냐며 타박했다. 엄마는 내가 그 아줌마를 붙잡고 아버지를 돌려달라고 말해주길 바랐던 것 같다. 내가 아버지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하길 바란 것 같다. 나는 엄마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자식 년도 소용없다며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엄마를 따라 들어가지 않고 뒷마당으로 향했다. 오전에 비가 왔는지 장판으로 덮어놓은 평상 위엔 물이 고여 있었다. 나는 소매로 물을 대충 훔쳐내고 그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짐들 틈에 끼워둔 보자기를 꺼내 몸을 감싸니 조금은 따뜻해졌다. 오래된 짐 사이로 곰팡내가 났다.
“화냥년.”
엄마가 여자를 향해 외치던 그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화냥년 때문에 엄마가 울었다. 화냥년 때문에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화냥년 때문에 나는 엄마에게 혼이 나야 했다.
“화냥년, 화냥년, 화냥년.”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한 채, 입 안에서만 굴렸다.
그날, 나는 '화냥년'이 남편을 빼앗아 간 여자를 부르는 말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기억하는 첫 욕이었다.
(이미지 출처 ChatGT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