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곰
엄마도 그렇고, 동네 아줌마들도 나를 보면 곰 같다고 했다. 반면 동생은 여시(여우를 가리키는 방언) 같다고 했다. 눈치를 빠르게 보고, 어른들 앞에서 곧잘 애교도 부렸다. 키 큰 나에 비해 동생은 작고 뼈마디가 도드라지게 말랐다. 두 살 터울이라 그런지 매일같이 부딪혔고, 자잘한 말다툼이 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많았다.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제대로 된 스케치북은 없었지만, 엄마가 은행에서 얻어오는 커다란 달력이 있었다. 달이 지나 달력 한 장이 넘어가야 비로소 그 뒷면을 얻을 수 있었다. 연필을 눌러 그린 선들이 잉크처럼 박히던 그 매끄럽고 두꺼운 종이 위로 마음껏 그릴 수 있어서 좋았다. 그것만큼은 내 차지라고 생각했다.
가진 것 없는 동생과 나는 달력 한 장을 두고도 실랑이를 벌였다. 서로 갖겠다고 달력을 잡아당기던 끝에, 달력 상단을 고정하던 철 부분에 동생의 손가락이 깊게 베였다. 순간 동생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피가 뚝뚝 떨어지더니 곧이어 줄줄 흘러내렸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동생의 손가락만 멍하니 바라봤다. 어찌할 바를 몰라 옆에 놓여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허겁지겁 풀어 손가락 위로 감쌌다. 하지만, 피는 멈출 기세가 없었고, 휴지는 순식간에 붉게 젖었다. 어느새 내 손까지 벌겋게 물들었다.
무서웠다. 동생의 손가락이 잘못되면 어쩌나, 정말로 없어지면 어쩌나. 그런 생각이 덜컥 들었고, 동시에 엄마에게 들켜 혼날까 봐 두려움이 밀려왔다. 동생은 끊임없이 울었고, 나는 땀이 밴 손으로 휴지를 더 가져와 손가락을 꼭 쥐었다. 숨이 턱 막히는 순간, 현관문이 열렸다. 마침 일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그 피범벅이 된 광경을 보고 놀라 병원으로 달려갔다.
나는 집에 혼자 남았다.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동생의 손가락이 다시 멀쩡해지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날 밤, 동생은 손가락에 붕대를 칭칭 감고 돌아왔다. 몇 바늘을 꿰맸다고 했다. 나는 결국 엄마에게 호되게 혼났고, 동생은 엄마 품에 안겨 칭얼대다 이내 잠들었다.
나도 장롱 뒤로 넘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나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손가락이 붙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라고, 조용히 웅크려 소리 없이 울었다.
하루는 동생이 밥상 다리 두 쪽만 세운 채 그 위를 미끄럼틀 삼아 놀고 있었다. 나는 거실 바닥에 엎드려 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고, 동생은 자지러지게 웃으며 밥상 위를 미끄러졌다. 웃음소리가 몇 번 반복되다 이내, 철컥하더니 밥상 다리가 부러졌다. 알루미늄으로 된 밥상은 이제 제대로 펼 수도, 접을 수도 없는 모양새가 되었다. 나는 다리를 이리저리 끼워 보며 애써 밥상을 다시 세워보려 했지만, 어느 쪽으로도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왔을 땐, 나는 조용히 밥상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고, 동생은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겼다. 엄마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밥상 쪽으로 와서 날 내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놀란 동생이 울음을 터뜨리자, 엄마는 그제야 목소리를 낮춰 동생을 안아 달랬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너는 어떻게 언니가 되어서 동생 하나 못 보니?”
엄마의 말에 가슴이 무거워졌고, 동생은 엄마 품에 안긴 채 나를 힐끗 보더니 혀를 살짝 내밀었다.
나에겐 얄미운 동생을 아버지는 예뻐했다. 동생에게만 용돈을 주기도 했고, 그 여자를 만나러 갈 때에도 종종 데리고 다녔다. 나는 늘 남겨지는 쪽이었고, 그게 너무 익숙해지자 언제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됐다. 묻는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걸, 기대는 오히려 더 서럽게 돌아온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엄마를 닮은 내가 아버지에겐 거슬렸던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엄마도, 동생도, 각자의 자리에서 아버지와 멀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동생을 예뻐했지만, 그건 잠깐 스쳐가는 미소처럼 가벼운 애정이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끝내 아버지에게 묻지 못했다. 왜 당신은 집이 아닌 곳을 향했는지, 왜 함께 사는 이들보다 먼 곳을 바라보았는지.
그 물음들은 누구의 입술에도 닿지 못한 채 시간 속에 잠겼고, 아버지는 대답이 사라진 자리에 조용히 남겨졌다.
(이미지 출처 ChatGT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