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들어간다
'홈캠에 포착된 남편의 불륜, 증거를 제출하자..'
'유명배우 불륜설에 휩싸여...'
'50대 주부 살인 미수로 기소, 남편의 바람 참지 못해..'
라는 등의 기사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왜 저런 사람하고 결혼을 해서 저런 꼴을 보고 살까, 저런 건 연애 기간 동안 충분히 걸러낼 수 있지 않나.'
'나라면 저런 일을 겪고 절대 같이 못 산다 바보처럼 굴지 말고 미련 없이 헤어져야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하여 장담하지 말라고 했던가. 그 소란스러운 이야기의 중심이 내가 되자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그저 어제의 일이 찰나의 악몽이었기를 오늘이 평소와 같은 하루이길 바랐다. 그런 와중에도 저 사람의 입에서 사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니 자기를 놓아달라고 할까 봐 두려웠다. 버려도 내가 버리고 싶은 이상한 감정이었다.
퇴근하고 온 집안에 어두운 적막이 가득하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따뜻했던 사람과 눈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등 뒤가 소름이 끼치고 원망스러웠다.
"여보, 내 말 좀 들어봐. 내가 정말 잘못했어. 한 번만.."
다시 또 구차한 변명을 시작하며 내 팔을 잡은 그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를 쓰다듬던 이 손으로 그 여자를...'
내 살갗에 닿은 그의 감촉에 소름이 돋는다.
등 뒤부터 시작된 소름은 목덜미를 거쳐 서서히 정수리로 올라앉아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저 입술로 그 여자를...'
생각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참고 있는 줄도 몰랐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왜 그랬어?"
가슴에 비수를 꽂을 수 있는 많고 많은 말들 중에 가장 무기력하고 의미 없는 질문이 내뱉어졌다.
나의 질문에 입을 움찔거리던 그 사람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크고 좀 쳐진 그의 눈매 안에 차올랐던 눈물이 끝내 떨어진다. 애써 참아보려는 그의 노력과는 달리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표정은 마치 내가 별거 아닌 일로 착한 남편을 괴롭히는 중인가 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용서할 수 없지만 버리지도 못하는 그를 상처 입히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당신 모습을 사랑했던 나의 마음을 절벽 끝에서 밀어버린 네가 미웠고, 그런 너를 사랑해서 붙들고 있는 미련한 내 모습이 한심했고, 너와 결혼한 나의 결정이 성급한 잘못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괴로웠다.
이야기를 듣고 감당할 자신이 없어 캐묻지 않았다. 정확한 해명 없이 사과로 묻기로 한 첫 번째 바람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일단락되어 보였지만 속은 곪고 있었다.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며 나를 안는 그의 품에서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고 불쾌하다.
가장 문제가 두드러졌던 점은 신뢰를 잃었다는 것.
여느 때와 같이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에 가있는 남편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불안하다.
'혹여 또 그 여자하고 몰래 연락하고 있는 건 아닐까?'
'와이프한테 들켰으니 당분간 조심하자고 하는 걸까?'
하는 의심이 점점 더 불어나 심장이 빨라지려 하자 손 씻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나온다.
하다가 만 설거지거리를 마무리하려 서있는 그의 등 뒤로 테이블에 놓여있는 핸드폰이 보인다. 핸드폰으로 손을 내밀다 거실 한쪽에 있던 장식장 유리 위로 내 모습이 비친다. 몰래 핸드폰으로 보려던 손이 볼품없고 비참하다. 마지못해 핸드폰을 등 뒤로 하고 고개를 돌린다.
용서하기로 했으면 묻어두고 꺼내보지 말아야 하는 것을 잘 알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자려고 눕자 그날의 기억과 감정이 점점 선명해진다. 그럴수록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서 공상에 빠져든다.
남편을 법원 앞에서 만나 이혼 서류를 접수하고 미련 없이 뒤돌아 서서 걷는다. 뒤에서 남편이 다시 생각해 달라고 애원하지만 이미 이성적이고 차갑게 식은 마음은 동요하지 않는다. 선선하고 가벼운 바람이 불고 햇볕은 따뜻하게 날 감싼다. 그리고선 시댁에 찾아가 일가친척을 모아놓고 이혼을 발표한다. 남편이 전에 만나던 여자를 못 잊어 결혼하고도 외도를 저질러서 나는 이 사람을 버리려 한다고. 나의 백 마디 보다 가족들이 보태는 한마디에 더 마음 아파하는 그를 본다.
그 여자 사무실에 찾아가 왜 내 남편과 놀아났냐며 다그치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 여자를 내동댕이 쳐본다. 당신들 딸이 내 남편과 바람이 났다는 상간녀 소장을 그 집 부모에게로 보내는 상상을 해본다. 필히 내 억장이 무너졌을 때처럼 마음이 쏟아져 내릴 것이다. 그렇게 공상에 빠져하지 못했던, 차마 하지 못할 일들을 상상하다 보면 진짜 복수한 것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것이 내가 그 일을 잊고 해소하는 방법이었지만 다소 좋은 해결책은 아니었다. 떠올리지 않는 것만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함 찬 지난 후에야 깨달았다. 되새기고 복수해 보는 나의 방법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