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대대적인 신제품 준비로 바쁘고 어수선했다. 와중에 마케팅 팀에서 새롭게 출시될 제품의 디자인을 들고 직원들의 의견을 들으러 다녔다. 청주지점에서 본사로 발령받아 출근한 지 일주일 남짓 됐다는 윤대리는 나에게 시안을 내밀었다.
"이 제품은 내 손안에 작은 휴식이라는 콘셉트인데요... 세 가지 시안 중에..."
윤대리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낯설지만 편안한 향기에 고개를 돌리자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어색하고 머뭇거리는 윤대리의 눈빛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경청하는 척 연신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 왜 인지 이 사람하고 결혼할 것 같아. 아 나 미친 건가? 처음 본 사람을 상대로 무슨 생각이람? 이렇게 주름 자글자글하고 얼굴 큰 아저씨랑? 나이도 나보다 한참 많아 보이는데. 유부남 같은데. 결혼했겠지?'
응큼한 생각이라도 하다 들킨 것 마냥 머릿속을 급히 갈무리하고 세 개의 시안 중 하나를 대충 골랐다.
그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이튿날 14층 재무팀에 가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닫히려는 찰나 문이 다시 열린다. 윤대리다.
"아! 감사합니다. 어디 가세요?"
윤대리가 인사를 건네어왔다.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 나가며 얼굴을 다시 보았다. 키가 크고 얼굴도 크고 웃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그런데 밀폐된 공간 속 그의 향기가 좋았고, 말하는 목소리가 설레었고 마주치는 눈빛이 선했다.
시간이 지나 결혼하고 3년 즈음 지났을 때 남편에게 언제 나하고 결혼할 생각이 들었는지 물었던 적이 있다. 남편은 이때 엘리베이터에서 처음으로 '나 왜인지 이 여자랑 결혼할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내가 남편에게 느꼈던 감정을 이야기하기 전이라 제법 놀랬다. 결혼 생각이 전혀 없던 31살이었어서 처음 보는 직원에게 그런 감정이 드는 본인 스스로가 웃기고 황당했었다고 말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쩌면 결혼할 운명이었을까?'(이 인간을 내가 거둘 운명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는 법무팀과 윤대리의 마케팅팀은 본사 6층, 파티션 건너 바로 옆이었다. 하필 6층 공용 정수기가 내 옆자리에 있어 하마 같은 윤대리는 수시로 내 시야에 들어왔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하다 보면 하루에 열댓 번씩 눈으로 안부를 묻는다.
녹초가 되어 야근을 하던 어느 날
'서연님, 저 오늘 차 가지고 왔는데 언제 퇴근하세요? 집이 같은 방향이더라고요.'
윤대리한테서 업무 메신저가 왔다.
13년이 흐른 지금, 그날 차 안에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내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시시콜콜한 질문을 하는 당신이 다정하다고 느껴졌다. 그날 차 안에서 어색했던 공기가 설레었고 성산대교를 건널 때의 야경이 예뻤다. 어반자카파의 beautiful day가 흘러나오던 별거 아닌 첫 데이트였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날 당신이 이유 없이 야근을 하고 있던 것도. 굳이 주차료 비싼 본사에 왜 차를 가지고 왔는지도. 정릉동에 살던 당신이 왜 목동이 같은 방향이라며 나를 태웠는지도.
그날 이후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퇴근 후 영화관에 앉아 영화 시작 전 조명이 막 어두워지는 찰나였다.
"서연 씨, 사실 저 그쪽을 좋아하고 있어요."
앞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 걸어온다.
"알고 있어요."
다소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네... 네? 어떻게 알았어요?"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짐작도 못했다는 놀란 표정으로 물어왔다.
"그렇게 티를 많이 내시는데 어떻게 몰라요. 근데 저도 좋아해요"
한껏 웃어 보이며 대답하자 윤대리의 주름지고 처진 눈은 포물선을 완만하게 그리며 웃어왔다. 마주 잡은 손은 따뜻하면서도 어색했다. 그렇게 영화 상영 내내 잡고 있던 손은 금세 축축해졌다.
"손에 땀이 나서요"
내가 손을 살짝 빼자 제 자리로 돌아가려던 윤대리의 손이 나의 허벅지를 쓸었다. 당연히 실수였겠지라고 덤덤하는 나와는 달리 말까지 더듬어가며 연신 죄송하다고 그게 아니라 변명하는 입술이 귀여웠다. 똑똑해 보이지만 어설프고, 듬직해 보이지만 귀여운 6살 많은 나의 직장 상사이자 남자친구였다.
무던하고 걱정 없는 성격의 윤대리는 예민하고 고민 많은 나에게 버팀목과 위로가 되었다. 자존감이 높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만나면서 ‘이 남자하고 결혼하면 평생 존경하고 배우며 살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인이 된 지 한 달 즈음되었을 때 엄마가 발목을 다쳐 수술을 했다. 아빠는 사업을 하셔서 출장이 많으셨기에 집에는 엄마와 나, 여동생 셋이 있는 날이 많았다. 우리 자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엄마는 한 번도 집을 비운 날이 없었기에 엄마의 입원은 우리에게는 처음 있는 부재였다.
여느 때와 같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있던 아침 7시, 전화벨이 울린다.
"집 앞인데 잠깐 내려올 수 있어요?"
전화기 너머로 다소 상기된 윤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지금요?"
당황스러움은 뒤로하고 재빨리 내려가보니 도시락통 두 개를 건넨다. 김치볶음밥이었다.
"어머니 입원해 계셔서 아침 못 먹을 것 같아서요. 서연씨꺼랑 하나는 동생 분꺼..."
쑥스럽게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뒤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라면하나 제대로 못 끓여 먹는 사람이 이걸 하겠다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썰고 볶고... 게다가 시간이 빠듯해서 본인은 먹지도 못했다고 한다. 도시락통을 받아 들고 집으로 올라와 동생에게 건넸다.
"오버네 정말. 그냥 결혼해 버려! 얼레리 꼴레리네."
나보다 더 신나 보이는 동생의 놀림을 뒤로하고 내 몫의 김치볶음밥과 출근 가방을 챙겨 계단을 내려갔다.
운전하는 윤대리 입에 한 숟가락씩 넣어주며 나누어 먹었다. 아직 따뜻했던 도시락통만큼이나 온기 가득한 출근길이었다. 빠르고 바쁜 일상 속에서 사사로운 행복이었다. 가슴이 몽글몽글해지고 감정이 벅차올랐다.
아마도 그때였던 것 같다. 처음으로 이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이런 사람이라면 평생을 함께하며 때로는 다투고 서로가 지긋지긋한 시기가 오더라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차마 쑥스러움에 입밖으로는 내뱉지 못한 나의 진심이었다.
봄의 끝자락에 만난 우리가 여름과 가을을 함께하고 겨울이 됐다. 만난 지 200일 되는 날이었다. 근사한 저녁을 예약했다고 자기만 믿으라는 말을 따라가 보니 63 빌딩이었다. '근데 무슨 200일을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58층의 파인다이닝에서 보는 야경이 너무 예뻤다. 식사 준비가 되는 동안 나에게 그이가 태블릿을 건넨다. 직접 만들었다는 동영상의 재생 버튼을 누르자 Elvis Costello의 she와 함께 200일의 연애 기간 동안 함께 했던 사진들이 당신의 짧은 소감들과 함께 지난다.
음악이 끝을 향해 달려갈 때 즈음 영상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서연아 사랑해. 나와 결혼해 줄래? Marry Me."라는 글과 함께..
갑자기 알 수 없는 의미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흐느껴 우는 나에게 윤대리는 프러포즈 반지와 함께 보증서를 건넸다. 훗 날 그때 왜 반지보다 보증서를 먼저 보여줬냐고 물으니 본인도 태어나서 그렇게 비싼 반지는 처음 사봐서 비싼 거 샀다고 자랑하고 싶었단다. 그때는 그런 순수함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곧 나와 너인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