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깼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하다 더 이상 잠이 안 오는 지경에 이르러 시계를 보았다. 서로 출근도 하지 않는 주말에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점심을 앞둔 11시 25분.
거실에서 중간중간 나의 기상을 재차 살피던 남편이 내가 일어난 것을 확인하자 분주해진다. 제대로 된 요리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람이 본인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총 동원해 아침밥을 차려낸다. 다 깨져서 뭉개진 계란프라이, 그 위에 힘조절을 못해서 울퉁불퉁하게 그려진 케첩 하트, 한 입 크기로 잘라 놓은 잘 익은 배추김치, 명절 선물로 들어왔던 김과 갓 지은 쌀밥.
나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밥을 차려놓고 모습이 예쁘다. 내가 사랑했고 나에게 진심이었던, 그래서 내가 결혼을 결심했던 사람의 다정한 모습 그대로다.
"내가 사랑을 듬뿍 담았어. 배고프지? 먹고 있으면 커피 내려줄게!"
기특해하는 나의 표정을 읽었는지 남편의 다소 신난 목소리가 정겹다.
"이게 프라이야 뭐야? 당신이나 먹어"
마음과는 다르게 날카로운 말이 내뱉어진다.
남편의 미소 띤 얼굴을 보자 사랑스러웠던 마음이 차게 식었다. 이런 일로 풀릴 마음이 아닌데 너의 다정함에 속절없는 내가 싫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고 떠들고 사랑을 속삭이려는 그가 미웠다.
내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너 없이 살 수가 없어서 그날의 사건은 마음 깊은 곳에 가둬두고 흘러나오지 못하게 문을 닫고 있는 것임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의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미안해 여보, 내가 제대로 다시 해줄게. 배고플 텐데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줘."
조급하게 말하는 남편의 얼굴 위로 얕게 깔려있었던 기대와 행복이 걷힌다.
이러는 내가 싫다. 상처받았다고 당신에게 똑같이 상처 주고 싶은 나의 간사한 마음에 실망감을 느낄수록 내가 나를 미워하게 만드는 당신의 과오가 원망스럽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맑은 날에 갑자기 몰려온 먹구름이 사방을 어둡게 한다. 멍하게 생각을 멈추고 바라보니 정수리부터 머리가 무거워지고 결국엔 관자놀이가 지끈거린다. 나에게 말 걸어주길 바라면서도 말도 섞기가 싫은, 같이 거실 소파에 앉아 서로 발을 엉켜놓고 여유롭게 책을 보고 싶다가도 내 눈이 닿는 곳에 주눅 든 남편의 모습을 보는 게 싫다. 그때의 나는 남편이 나를 어떤 모습으로 바라봐주길 바랐던 걸까. 나도 내 마음을 알 수 없는 답답한 시간들이 이어졌다.
다정하고 똑똑한 남자가 이상형이었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았으나 키가 크고 인상이 선한 그에게 끌렸다. 평생을 함께하며 존경하고 배울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고 그런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가방에 늘 책 한 권을 챙겨 다니고 공부하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이 사람과 대화하면 마음이 편했고, 과거를 거름 삼아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방식을 통해 나는 그와 함께 하는 미래를 그려보곤 했다. 그럴수록 지식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깊이 있는 그에게 빠져들어갔다. 그런데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명철하고 빛났던 눈빛을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이렇게 만든 것일까 하는 자책과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원망을 번갈아가는 나날이 지났다.
그러다 문득 이대로는 회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엉켜진 매듭은 풀 수 없다면 잘라버리고 새로 이어서 시작하면 된다. 퇴근하고 남편과 집 근처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어떤 이야기를 할지 머릿속에서 많은 정리를 했는데도 막상 남편과 마주 앉아 있으니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힘들게 첫 말을 뗐다.
"우리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 이야기를 해보자."
다소 차분하고 침착해진 나의 분위기에 남편도 안정감을 느꼈는지 슬쩍 눈치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어떻게 다시 연락을 하게 됐고 어떤 마음으로 만났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둘이 손을 붙잡고 울었다가, 그 손을 뿌리쳤다가, 다시금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연애 때 한 번을 안 싸우다가 결혼하고 잦은 다툼으로 그도 많이 답답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그러던 중에 5년을 만나던 전 연인의 안부 연락이 내심 반가웠을 거다. '그저 오랜 친구를 만나듯 가벼운 마음이었겠지'라고 생각이 갈무리하고 나니 며칠 동안 답답했던 마음이 다소 편안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을 두 번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또다시 이런 일이 생겼을 때는 그때는 정말 이혼하기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카페에서 일어섰다.
늘 둘이 퇴근길에 걷던 이 골목이 오늘따라 아늑하고 편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늦은 어두운 밤 조심스럽게 내 손에 닿은 너의 손가락이 간지럽다. 눈의 절반 즈음을 차오른 눈물이 찰랑거린다. 코끝이 시리다. 애써 눈물을 펼쳐보고 바람에 말려보아도 결국엔 왈칵 쏟아진다.
이 일이 지난 후에도 가끔 남편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히고 도망가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이러려고 한 결혼이 아닌데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결정이 숨 막히게 목을 죄어왔다. 나아질 것 없는 반복되는 일상과 다툼에 지쳐 갈 때 즈음이면 어김없이 이 날이 생각났다. 결국엔 당신의 말 한마디에 울고, 웃고, 위로받았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