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너와 나 사이, 다정한 비효율>
굳이 쓰던 마음을 회수하고 재설계하는 일.
나를 예우하기 위해 굳이 움직이는 사투를 시작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 안의 에너지는 유한하며, 나를 돌보는 데에만 써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러고 나니 내 시선은 자연스레 담벼락 너머의 타인에게로 향했다. 그동안 서툴렀던 나는 얼마나 많은 ‘굳이’를 엉뚱한 곳에 쏟아붓고 있었나.
나는 이제 20대의 앞모습을 떠나보내고 돌아선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길지도, 그렇다고 마냥 짧지도 않은 시간을 지나오며 요즘 내가 굳이 하지 않게 된 것들이 분명해졌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새로운 사람에게 애정을 쏟는 일이다. 오해는 마시라. 여전히 나는 사람이 좋고, 북적이는 밤을 사랑한다. 다만 예전의 나는 관계를 깊게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심지어는 무의식 중에도 기꺼이 나를 깎아냈고, 그 노력이 당연하다고 믿었다. 누군가의 눈동자에 서릴 실망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 마음에도 없는 다정한 문장을 골라 전송하던 밤들. 정작 텅 빈 방에서 홀로 소진되어 가는 줄도 모른 채 타인의 기분을 살피느라 내 마음을 깎아내고 있었다. 그땐 그것이 당연한 예의인 줄 알았고, 그래야 무리의 이방인이 되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어린 날의 서툰 다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그 일은 더 이상 ‘굳이’ 하지 않는 일이 되었다. 알림 창을 슥 밀어 올리고, 관심도 애정도 담겨 있지 않은 메시지 위로 내 하루를 보낸다. 바로 답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이 많아질수록, 내 마음의 요새에는 숨 쉴 틈이 생겼다.
누군가는 이런 변화를 두고 염세적이거나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간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충분히 채워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굳이 큰 품을 들이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비슷한 이유로, 나에 대해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일도 굳이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내가 부족해서, 무언가 잘못해서 그들이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장문의 메시지로 나를 해명하고, 언젠가는 그들이 나를 사랑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를 돌보는 일에 쓰는 돈은 결코 낭비가 아니었지만, 마음이 없는 관계에 나를 깎아 넣는 일이야말로 진짜 '낭비'였다는 것을.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담백한 인정이 나를 구원했다. 필사적으로 나를 해명하기보단 심심한 사과가 많아졌다. 조건 없이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스러운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후자에게 사랑을 구걸하느니 전자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낭비’되던 나의 ‘굳이’를 회수하기로 한 것이다.
반대로, 요즘 내가 여전히 ‘굳이’ 하게 되는 일들도 있다. 더 많은 사람으로 자리를 채우기보다는 이미 곁에 있는 사람들을 더 깊이 사랑하는 일이다. 편리함 대신 시간을 택하고, 빠름 대신 마음을 쓰는 선택들이다. '선물하기' 버튼을 누르면 다음 날 새벽이면 마음조차 도착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매끈한 속도에 올라타는 대신 현관 앞에 서서 신발 끈을 고쳐 묶는다. 친구가 좋아하는 향이 나는 향수를 찾으러 백화점 매장을 거닐고, 빳빳한 종이 위에 만년필로 축하의 온도를 적어 넣는다. 느리고 비효율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이 우직한 동선이야말로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고스란히 담아내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물리적 거리다.
이제 나에게 ‘굳이’는 더 이상 번거로움의 동의어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유한한 에너지를 어디에 쏟을지 결정하는 가장 정직한 지표다. 굳이 애쓰지 않기로 한 자리에선 침묵의 평온을 얻었고, 굳이 마음을 쏟기로 한 자리에선 사랑의 온기를 얻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그었던 차가운 경계선들이, 역설적이게도 내가 진정으로 껴안아야 할 사람들을 더 선명하게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나의 ‘굳이’를 허락할 사람들을 선별하는 것, 그것은 나를 예우하는 일인 동시에 내 곁의 사람들을 온전히 귀하게 대접하는 법이기도 했다. 효율의 세상에서 기꺼이 길 잃은 미아가 되며, 나는 오늘도 우리가 나누는 이 느리고도 다정한 마음들이 꽤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