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주말마다 사서 고생을 하는가?

'러닝'이라는 가장 정직한 비효율에 대하여

by 레슬러 플라톤

한강의 좀비, 아니 러너들

주말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한강 공원이나 도심을 걷다 보면 기이한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무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옵니다.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고, 온몸은 땀범벅입니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들은 죽을힘을 다해 달립니다.

요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러닝 전성시대'입니다. 유명 마라톤 대회 접수는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만큼이나 치열하고, 인스타그램엔 매일 밤 달리는 사람들의 인증샷이 쏟아집니다. 체육 교사로서 저는 이 현상이 참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그 누구보다 '효율'과 '편안함'을 따지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걷기 싫어 전동 킥보드를 타고, 계단 대신 에스컬레이터를 찾습니다. 직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칼퇴근을 할지, 어떻게 하면 일을 효율적으로 끝낼지 매분 매초 고민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렇게 효율을 따지던 사람들이, 주말만 되면 수만 원의 참가비를 내고, 내 돈 들여 비행기를 타고 가서, 42.195km라는 극한의 고통을 '사서' 겪습니다.

농구, 축구, 야구 같은 구기운동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체육교사까지 된 저로서는, 공 없이 달리는 것이 매우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아기가 태어나고 난 뒤 구기운동을 하러 나갈 시간이 되지 않아 동네에서 러닝을 해보니 "달리는 것이 이렇게 상쾌했던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편안한 소파를 놔두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길 위로 나가는 걸까요? 저는 철학자 버나드 수츠의 책에서 그 답을 찾았습니다.


골프공을 손으로 넣으면 안 되나요? (버나드 수츠의 '게임')

철학자 버나드 수츠는 그의 저서 <여치(The Grasshopper)>에서 '게임(스포츠)'을 아주 독특하게 정의했습니다.

"게임이란, 불필요한 장애물을 자발적으로 극복하려는 시도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골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골프의 목적은 작은 공을 구멍에 넣는 것입니다. 이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냥 손으로 공을 집어서 구멍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코스를 이동하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공을 넣는건 3초면 끝날 일이죠. 하지만 골퍼들은 굳이 가느다란 막대기(채)를 휘두르는 불편함을 감수합니다. 심지어 공을 멀리 쳐내고, 바람을 계산하고, 벙커에 빠지는 위험을 감수합니다. 즉, 스스로 '비효율적인 규칙(장애물)'을 만들고,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러닝도 마찬가지입니다. A지점에서 B지점까지 가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택시나 지하철을 타는 것입니다. 하지만 러너들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오직 두 다리라는 가장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인 수단을 선택합니다. 수츠의 통찰에 따르면, 우리는 단순히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강요하는 효율성의 법칙을 거부하고, 스스로 불편함을 선택하는 고도의 철학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효율성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방법

우리의 일상을 돌아봅시다. 직장과 학교는 '효율'이 지배하는 공간입니다. 이곳에서의 장애물, 업무, 시험, 성과는 내가 원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남이 시킨 일을 빨리, 잘 처리하지 못하면 무능력자가 됩니다. 우리는 그 시스템의 부속품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달립니다.

달리는 행위는 '내가 선택한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시켜서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에게 명령하고, 내 몸이 그 명령을 수행합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그 순간은 고통스럽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고통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내 삶의 주인'이 됩니다. 야근이나 스트레스 같은 비자발적인 고통에 지친 영혼을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러닝이나 운동같은 자발적인 고통으로 그것을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도 직장에서 학생들이나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날, 선후배들과 신나게 농구 한판하고 돌아와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나와 시원한 물(사실은 캔맥주) 한잔을 마시면, 관리자에게 들었던 잔소리는 물론이고 일하며 받은 모든 스트레스가 함께 씻겨 내려가는 기분을 느낍니다.


Gemini_Generated_Image_1dy5cr1dy5cr1dy5.png


마치며: 개미의 세상에서 '철학하는 여치'로 살아가기

이솝 우화에서 여름 내내 노래만 부르던 곤충은 겨울이 오자 굶어 죽는 비극을 맞습니다. 우리는 그를 '게으른 베짱이'라고 부르며 반면교사로 삼아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철저히 근면 성실한 '개미'가 되기를 강요받았으니까요.

하지만 버나드 수츠는 그의 저서 <여치>에서 이 비운의 주인공을 다시 무대 위로 불러냅니다. 그리고 그에게 '여치'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며, 그를 게으름뱅이가 아닌 '게임하는 인간의 이상형'으로 재해석합니다. 수츠는 묻습니다. "만약 먹고사는 문제가 완벽히 해결된 유토피아가 온다면, 인간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생존을 위한 노동이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위는 바로 목적 없는 활동, 즉 '놀이'입니다. 수츠에게 있어 우화 속 굶어 죽은 베짱이는, 사실 시대를 너무 앞서가 유토피아의 삶을 미리 실천했던 선구자, '철학자 여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말마다 운동화 끈을 꽉 조이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기계 부속품처럼 돌아가는 효율성의 감옥인 일터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나만의 작은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만큼은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고 오직 나의 의지와 나의 호흡만이 세상의 전부가 됩니다. 그러니 주변에서 "돈 내고 왜 그 고생을 해?"라고 묻거든, 이제 미안해하거나 머뭇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답해주세요.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짓을 하며, 가장 인간다움을 느끼고 있다"고.

남들이 보기엔 그저 '사서 하는 고생'일지 모르지만, 그 거친 호흡과 흐르는 땀방울이야말로 우리가 일만 하는 개미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가장 뜨거운 증거입니다.

오늘도 도로 위를 달리는, 세상 모든 '철학하는 여치'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작가의 이전글100억짜리 선수가 인성을 잃어버리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