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소환 성공
평범한 일요일 오전이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언니와 오랜만에 산책 겸 걷기 운동을 한 시간 남짓하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최근에 언니가 커피머신을 샀다며 자기 집으로 가서 커피 한잔을 하자고 한다. 커피를 평소 즐겨하지는 않지만 새롭게 산 기계도 구경하고 수다를 더 떨고 싶어 언니를 따라 집으로 들어서니 '(백)설기'라는 이름의 언니집 강아지가 짖으며 반가워한다. 다양한 종류의 커피 캡슐도 신기했고 기분 탓인지 모르겠으나 커피 맛도 더 좋았다.
최근에 새로운 기관으로 발령이 난 언니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다. 업무 파악도 힘들고 새롭게 만난 상사도 언니 말에 의하면 보통은 아닌 것 같았다.
"아.. 내일 회사 가기 싫다. 요즘에 진짜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아. 일도 잘 모르겠고 힘들다."
언니의 말을 듣고 고개만 끄덕일 뿐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친한 동생 집에 있는 오락실 게임기가 생각났다. 오래전 한차례 빌렸다가 4년 전에 반납한 게임기였다. 동생의 남편이 산 게임기였는데 아이들이 어리다 보니 게임을 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OO(친한 동생)에게 게임기 다시 빌릴까?"
나의 한마디로 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순간적으로 눈빛에 설렘이 가득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진짜? 보글보글 게임 너무 하고 싶어!" 40대 중반의 나이인 언니와 나는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언니는 대학 시절 오락실 죽순이로서 철권과 더불어 보글보글의 찐 팬이었다. 언니만큼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오락실 게임기에 동전을 많이 넣었던 기억이 있다. 친한 동생에게 게임기를 처음 빌렸을 때 우리는 1년 가까이 보글보글 게임에 열중하였고 그 결과 깨기 어렵다는 100라운드를 우리 손에 쥐여 버블드래곤의 아빠, 엄마를 구할 수 있었다. 스토리 텔링이 있는 게임이었던 것이다. 유튜브를 보며 깨는 방법을 연구하며 수십, 수백 번의 실패 끝에 얻은 성공이라 그 희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렇게 보글보글 게임에 진심이었던 우리가 일상에 치여 잊고 있었던 게임을 소환하기로 한 것이다. 바로 친한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대여여부를 물어보았다.
"OO야! 혹시 게임기 다시 빌릴 수 있을까?"
"그래, 어차피 지금 하지도 않으니까 언니가 가져가!"
"그래도 &&(동생남편)에게 한번 물어봐줄래?"
잠시 후 흔쾌히 빌려가도 좋다는 연락이 와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동생 남편도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는 게임기를 못쓸 것 같다며 언제든 가져가라고 해서 고마웠다. 가정용이기는 하지만 오락실에 있는 기계와 별 다르지 않아 그 크기가 생각보다 매우 크다. 당장 남편에게 부탁을 하여 동생네에서 가져오기로 하였다. 늘 그렇듯 운전도 잘해주고 내 부탁을 잘 들어주는 고마운 남편이다. 트렁크에 들어가지가 않아 뒷좌석을 앞으로 눕혀 겨우 차에 싣고 언니집까지 무사히 배달을 하였다. 적당한 위치에 게임기를 배치하고 전원을 켰다. 4년 만에 하는 게임이었지만 모든 게 다 생각이 나는게 신기하고 반가웠다.
보글보글 게임의 정식 명칭은 '버블보블(bubble bobble)로서 1986년 일본의 다이토에서 출시된 게임이다. 귀여운 캐릭터인 버블 드래곤이 거품을 발사하여 적들을 거품에 가두어 터뜨리는 간단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1인에서 최대 2인이 할 수 있고, 두 사람의 합이 잘 맞아야 적들을 쉽게 물리치고 점수도 많이 쌓을 수 있다. 처음에는 좀 버벅댔지만 게임을 할수록 모든 게 다 생각났다. 버블을 계속 만들고 적들을 모두 죽이면 가지, 피망, 오이, 버섯 같은 채소와 사탕, 음식과 같은 캐릭터가 하늘에서 떨어지는데 이것을 먹으면 점수가 올라간다. 가끔 목걸이와 보석도 나오고 커다란 왕캐릭터도 나온다. 라운드가 진행될수록 더욱더 다양한 몬스터와 아이템들이 나온다. 사탕 아이템도 그 색깔에 따라 기능이 달라져서 상황에 맞게 잘 먹어야 한다. 노란 사탕은 버블이 많이 나오고, 파란 사탕은 버블 속도가 증가하며 분홍 사탕은 버블 거리가 증가한다. 지팡이를 먹으면 몬스터가 사라지고 꽃들이 나오는데 모든 꽃을 먹어야 점수가 많이 올라간다. 불버블이나 번개버블을 적당한 위치에서 터뜨려야 적들을 줄일 수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 고래유령이 나타나 우리를 쫓아다니므로 최대한 적들을 빨리 죽이는 게 좋다.
각 라운드마다 사용되는 전략이 다른데 상대방과의 합이 정말 중요하다. 각자 맡은 구역의 적들을 물리친 후 상대방을 도와주는데 버블을 쏴줘서 상대방을 위로 올려주어야 할 때도 많다. 언니와 나는 수백 번의 게임을 같이 한 상태라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손발이 맞는 게 너무나 웃겼다. 중간에 영어가 들어있는 버블도 나와 EXTEND 버블을 완성하면 목숨이 하나 더 생긴다.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영어 버블은 상대방에게 기꺼이 양보해야 하고 적들을 한꺼번에 터뜨려야 과일 같은 보상이 더 많이 생긴다. 또한 버블 속에 가둬둔 적들을 터뜨리지 않으면 빨갛게 되면서 다시 살아나므로 되도록 빨리 터뜨려야 한다. 불을 쏘는 몬스터, 통통 튀는 몬스터 등 귀여운 캐릭터가 이 게임에 중독되는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휴대폰이나 컴퓨터 게임은 별로 해본 적이 없으나 오락실 게임기는 정말 재미있다. 조이스틱을 이용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버튼을 쉴 새 없이 누르며 버블을 발사하며 손맛을 느낀다. 아는 동생네에서 빌려온 게임기는 가정용 오락기이므로 동전을 따로 넣지 않고 버튼만 누르면 게임을 무제한으로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에 몇 라운드까지 갈 수 있냐는 것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므로 최대한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나를 올려줘!"
"물약 먹어!"
"불풍선 꺼!"
"풍선 타고 올라가!"
"적들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
4년 만에 한 보글보글 게임인데 왜 다 생각이 나고 이렇게 합이 잘 맞는 건지 게임을 하는 내내 둘 다 고등학생 학부모라는 사실을 잊고 20대 초반의 대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언니도 스트레스가 풀리는지 정말 신나 했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설레는 일이 적어지고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도 쉽지 않다. 오랜만에 눈이 반짝반짝 해지는 추억이 가득한 게임을 만나 정말 반가웠다. 100라운드를 깨기라는 목표가 생겼고 이는 우리 생활에 작은 활력을 줄 것이다. 엄마, 아내, 딸, 직장인으로서의 주어진 역할이 많지만 이 게임을 하는 동안만큼은 근심 걱정을 잊을 수 있을 것 같다.
보글보글 게임을 틀었을 때 나오는 배경음악은 명곡으로서
그 자체만으로 가슴을 뛰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