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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캘리그래피

by 느긋

코로나 1년 전쯤 (어떤 시기를 설명할 때 코로나를 기준으로 말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1년 동안 시간선택제 근무를 했다. 그동안 꽤 오랜 기간 열심히 일을 해서 좀 쉬고 싶었던 걸까? 월급은 반토막이었지만 오전에만 근무를 하고 오후에는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어서 꽤나 만족했던 시기였다. 오후에도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챙겨야 했기에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생긴 시간을 어떻게 하면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지 꽤나 많은 고민을 했다. 결국 찾은 것은 동네 도서관에서 한 캘리그래피 수업이었다. 수업 시간이 나의 상황에 잘 맞았고 무엇보다 그 시절 캘리그래피에 관심이 많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수채캘리그래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업을 받는 동안 화선지, 붓, 먹물 등을 이용하여 열심히 했으나 몇 주간의 강좌가 끝나고 개인적으로 연습을 따로 하지 않으니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그 많고 많은 재료들은 집 창고에 몇 년간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 다시 캘리그래피에 도전을 한다. 내가 사는 지역구의 평생학습관에서 진행하는 직장인을 위한 '야간캘리수묵화지도사' 과정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프로그램명도 '퇴근길 신나-휴'다. 평생학습관에서 진행되는 다양한 프로그램 시간이 주로 오전, 오후라 직장인이 안타깝게도 들을 수 없는 것들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직장인들을 위한 강좌가 열려 바로 신청을 했다. 덕분에 계속 묵혀두었던 캘리그래피 재료들을 꺼내 살펴보니 다시 설레는 마음이 생겼다. 그동안 많이 방치되어 사용할 수 없는 재료들을 정리하고 캘리그래피 첫 시간을 기다렸다.


매주 월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수업이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가면 딱 좋을 시간이다. 앞으로 총 10주간 수업을 듣고 3급 자격증(민간)을 딸 수 있는 기회까지 있다고 하니까 열심히 하고 싶은 각오가 생긴다. 재료들을 챙겨 평생학습관으로 가니 인상 좋은 강사님이 환한 얼굴로 반겨주어서 좋았다. 신청하신 분들이 다 오지 않았지만 약속된 시간이 되어 강사님이 인사와 함께 이런저런 말씀들을 편하게 해 주셨다.


캘리그래피는 서예와는 비슷하지만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아름다움'이라는 뜻의 '캘리'와 '문자 또는 쓰기'라는 뜻의 '그라피'가 만나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을 뜻한다. 요즘에는 '멋글씨'라는 말로도 표현한다고 하니 듣기가 좋았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개성을 살리면서 천천히 꾸준히 하면 된다는 강사님의 말씀이 인상 깊었다. 수강생들이 다 직장인이므로 지각을 해도, 집에 빨리 가도 되지만 되도록 결석하지 말고 많은 것을 얻어가면 좋겠다는 말씀에 10주 개근에도 도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첫 시간이라 10명 남짓한 수강생 분들의 자기소개가 이루어졌다. 40대에서 60대의 중년의 여성분이 많았고 유일한 남자분이 소개를 할 때는 박수소리가 더 컸다. 저마다 캘리그래피에 대한 로망을 드러내며 편안하게 소개를 해주셨다. 어떤 분은 명절에 자식이나 손주들에게 용돈을 줄 때 봉투에 멋진 문구를 써주고 싶어서 오셨고, 아침마다 음료를 배달해 주시는 요구르트 아주머니께서 캘리그래피를 선물해 주신 게 너무 멋져 보여서 오신 분도 계셨다. 좋은 문구를 자꾸 찾아보며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인생을 더 의미 있게 만들고 싶은 분도 인상 깊었다. 덕분에 나도 부담 없이 인사를 했는데 이런 자리에서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는 게 굉장히 오랜만이라 재밌었고 왠지 학생 때로 돌아간 느낌도 들었다.


"안녕하세요? OO동에서 온 OOO입니다. 제 성격이 급한데 캘리그래피를 통해 좀 느긋하고 여유로움을 배워보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후 기본적인 선긋기를 연습하였다. 서예붓이 아닌 플라스틱 붓을 사용했지만 먹물을 이용하였다. 강사님의 설명대로 연필 쥐듯이 붓을 잡고 붓이 보이지 않게 살짝 집어넣으면서 가로와 세로 선을 그어보았다. 오랜만에 잡은 붓이라 굉장히 어색해 선 긋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는 선부터 굵은 선까지 단순하지만 선을 긋는 것이 재밌었다.


"힘을 빼세요!"


어깨와 손목에 힘이 들어가면 캘리그래피를 절대 오래 할 수 없다는 강사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요즘 인생에서 힘 빼는 연습을 내 나름대로 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힘을 빼라니 반가웠다. 그동안 운동을 포함한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본 결과 힘을 빼는 게 가장 어려운 경지인 것 같다. 인간관계에서도 힘을 빼는 게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힘을 빼고 싶으나 그 생각을 하면 오히려 힘을 들어간다. 그래도 신경을 쓰며 선을 그으니 잡생각이 나지 않고 여기에만 집중을 해서 좋았다. 때로는 다른 분들의 잡담을 들으며 연습하니 이 또한 재밌기도 하였다.


강사님께서 첫 시간의 선물로 수강생들이 원하는 문구를 엽서에 써주셨다. 검색을 해보면서 무슨 문구를 부탁드릴까 고민했는데 그 순간 평소 아빠가 자주 하시는 말이 떠올랐다.


"훈훈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


강사님이 선물로 써주신 엽서


우리 집의 가훈인 듯 가훈 아닌 가훈 같은 느낌의 문구이다. 눈앞에서 강사님이 글씨를 써주시는 걸 보는 것 자체가 힐링이었다. 짧은 시간에 이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어 내는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큰 재능을 갖는 데까지 강사님은 10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하셨다. 의자에 한번 앉으면 3시간에서 5시간까지 연습을 해서 허리디스크까지 걸리셨다던 강사님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예전 같으면 강사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것 같으나 요즘은 내 속도로 꾸준히 가는 것을 터득하여 그냥 대단하게만 보였다. 일단 앞으로 10주 과정에 성실히 참여하고 숙제도 잘하며 말 잘 듣는 학생이 되고 싶었고,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언젠가 캘리그래피 흉내는 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다음 주 월요일은 공휴일이라 쉬는 게 너무 아쉬우나 욕심내지 않고 성실히 숙제를 잘하는 것으로 나를 달래 본다. 그다음 수업에는 강사님이 직접 도장까지 지우개로 만들어 주신다고 하니 너무나 기대가 된다. 낙관에 들어갈 문구는 고민할 필요가 없어 좋다.


'느긋'이라는 낙관이 나의 글씨와 만나는 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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