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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긋 May 31. 2024

느긋하다

마음에 흡족하여 여유가 있고 넉넉하다.

 얼마 전, 국민학교 시절의 통지표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행동발달상황의 행동특성 문구가 나를 빵 터지게 만들었다. "일의 처리가 빠르며 모든 일에 의욕을 보이는 적극적인 어린이입니다."라는 정감있는 담임선생님의 손글씨가 늦은 밤 나를 오랜만에 소리 내서 웃게 했다. 이때도 일의 처리가 빨랐다니 너무 웃겼다.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생활통지표

 일적인 면에서 나 자신을 스스로 생각할 때 일을 잘한다는 주변의 평가에 집중하기보다 일만 빨리, 대충하는 약간의 조급증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평가한다. 학교에서 메신저의 무언가 제출하라는 메시지를 보면 그때그때 처리를 해버리고, 그 일에 대해서 맘 편히 잊어버리는 스타일이다. 메시지가 쏟아질 때는 대충 읽고, 가끔은 잘못 해석해서 놓치는 일도 제법 많다. 그래도 내 교실은 잘 굴러가서 크게 신경도 쓰지 않는 편이다.

 담임으로서 자잘한 일부터 큰 일까지 처리를 하기 위해서는 절대 일을 미루면 안된다는 마음가짐이나 습관이 언제부턴가 나의 직장생활에서 큰 부분으로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은 왜 이렇게까지 빨리 일을 처리하려는 성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었는데 태어날 때부터 나는 그냥 그런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내가 지난 19년 간 아이들의 행동발달특성을 쓸 때 "일의 처리가 빠르다"라는 문구를 한번도 써본 적이 없다고 확신한다. 초등학생에게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지 좀 진지하게 생각하면 풋-하고 웃음도 나온다. 얼마나 어린아이가 일을 빨리 처리하면 이런 문구를 선생님께서 써주셨을까. 어렸을 때 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똘똘한 아이였음에 분명하다. 지금은 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애쓰고 있는 40대 중반의 한 여성이지만 잠깐 동안의 추억 여행은 나를 소소한 행복감에 빠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제 나의 급한 성격에 대한 고민을 더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보다 잡무가 많은 학교 상황과 나의 빨리빨리 기질이 만나서 에너지를 뿜고 있다. 이제 이 에너지를 조금은 누르고 싶다. 올해 새해 다짐이 여유롭고 느긋하게 사는 것이었는데 잘 되지 않고 있다. 말도 천천히 하고, 행동도 여유로운 사람이 정말 부럽다. 그런 척은 나도 노력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내면 깊게 여유를 진정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 할 것 같다.


느긋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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