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3 아들이 도통 운동도 안 하고 먹는 것만 늘어서 걱정이 되었다. 예전에 잠깐 배웠던 무에타이 도장에 주 3회라도 다시 다녀보라 권유하니 크게 마다 하지 않는다. 원비를 결제하러 오랜만에 무에타이 도장에 방문하여 관장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나도 배워보고 싶은 생각이 스쳤다.
"저 같은 아줌마도 무에타이 배울 수 있을까요?"
"아휴~ 형님, 누님들도 많이 배우고 계십니다. 저희 도장에는 오래되신 분들이 많으세요. OO어머님도 체격이 좋아서 운동 잘하실 것 같습니다. 일단 다음 주에 체험 한번 해보시고 결정해 보세요! 다음 주 내내 체험하러 나오셔도 됩니다."
"오, 정말요? 알겠습니다. 다음 주에 한번 체험하러 나오겠습니다."
50대로 보이는 관장님의 자부심 있어 보이는 태도와 친절함이 나의 배움에 대한 동기를 더 강화시켰다. 형님, 누님이라는 호칭도 정감 있어 매우 좋았고, 초등학생들도 운동을 하는 체육관의 분위기도 편안해 보였다. 나에게 무에타이는 엄청 과격한 운동이었는데 4,50대 분들도 많이 한다니 용기가 생겼다. 사실 체육관 앞에 있는 '여성들에게 각광받고 있는 무에타이 다이어트!'라는 문구에 끌렸다. 무에타이를 하면 나의 고민인 뱃살과 옆구리살, 팔뚝살을 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주가 되어 바로 퇴근하자마자 집에 가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도장에 갔다. 막상 배우려고 가니 느껴지는 공기가 그 전과 달랐다. 무도인의 기본 예의인지 몰라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인사를 너무 잘해주어 어색함이 조금 가셨다.
"양말 벗고 가방은 이쪽에 놓으시면 됩니다"
"아... 네."
쭈뼛쭈뼛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기합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체육관을 뛰기 시작한다. 타이머를 맞춰두고 시계방향으로 3분, 반시계방향으로 3분 동안 뛰니 숨이 많이 찼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체육관을 길게 왔다 갔다 달리기를 하면서 몸을 풀었는데 내 수준에서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저기서 힘을 내라는 응원과 기합 소리가 나의 무거운 다리를 계속 움직이게 만들었다. 내가 간 시간에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친구들만 많아 적잖이 실망을 하던 차에 중년의 여성분이 오셔서 매우 반가웠다. 왠지 동지가 생긴 기분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체육관을 오래 다니신 고수였다.
달리기로 몸을 예열한 후 곧바로 체력단련에 들어갔다. 나의 운동 메이트는 중학생 여자친구였는데 몸이 단단해 보여 멋졌다. 체육관의 시스템은 잘 모르지만 관장님과 막 제대한 젊은 사부님이 계시고 나 같은 초보자들을 상대해 주는 오래된 경력의 코치님들이 있는 것 같았다. 코치님들은 대부분 중고등학생으로 운동을 열심히 한 친구들이었다. 아무튼 자식뻘 되는 코치님과 짝을 이루어 윗몸일으키기, 누어서 올라오기, 제자리 100번 뛰기, 스쾃, 높이뛰기 등 운동을 번갈아 가면서 했다. 뱃살이 많은 나는 윗몸일으키기 운동이 정말 어려웠는데 다들 체력들이 대단했다. 관장님이 전반적으로 운동을 진행시키셨고 끊임없는 응원과 격려의 소리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배경음악으로 템포가 빠른 댄스곡이 나오는 것도 나의 정신무장에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처음이신데 매우 잘하고 계십니다. 원래 처음에 이렇게 끝까지 운동하시는 분이 몇 분 안 계시는데 대단하신 겁니다. 자신의 컨디션과 수준에 맞게 운동하시면 됩니다."
나와 파트너를 이룬 중학교 2학년의 여자 코치님이 나의 수준에 맞추어 운동을 해주어서 재밌고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 왼발을 뒤로하여 서로의 왼발을 터치하는 연습을 하는데 놀이 같아 재밌었고 오랜만에 제대로운동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쭈그려 앉아서 엉덩이와 무릎이 바닥에 닿으면 지는 연습을 통해 상대방을 넘어뜨려야겠다는 승부욕도 살짝 올라왔다. 앉아서 돌아다니며 상대방의 발목을 잡아채는 연습도 매우 힘들었지만 평소 해보지 않은 운동이라 너무 재밌었다. 무엇보다 10대들과 운동을 하면서 체육관 안의 뜨거운 에너지를 느낄 수 있어 나도 조금은 젊어지는 기분이었다.
글러브를 착용한 것만으로도 나 자신이 멋져 보였다.
얼마 정도의 체력단련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킥과 펀치를 배웠다. 글러브를 끼라는 말에 어리둥절하면서 남들처럼 면장갑을 끼고 글러브에 손을 넣으니 정말 멋진 운동선수가 된 느낌을 잠시 받았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글러브를 낀 순간이었다. 40대 아줌마도 할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못하는 게 없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관장님과 중학생 여자 코치님이 시범을 보여주고 펀치를 날리는데 소리가 매우 커서 깜짝 놀랐다. 멋있었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지만 코치님처럼 원! 투! 잽을 날려보았다.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기분만은 정말 좋았다. 오른발을 뒤로하고 까치발을 한 채 두 손으로 가드를 올리고 원투 잽을 날리니 얼마 전에 본 중국 영화 "맵고 뜨겁게"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영화 '맵고 뜨겁게' 한 장면 (출처: 넷플릭스)
영화감독이자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실제로 50kg을 빼면서 영화를 찍었는데 대역이나 분장 없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삶에 큰 의미가 없고 주변은 온통 그녀를 배신하고 이용만 해 먹는다. 그런 그녀가 우연히 복싱을 만나 자신을 사랑하고 자존감을 높여가는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나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영화를 보고 간 후에 무에타이를 체험하러 가서 더 큰 동기부여가 된 걸까? 체험이 끝나고 바로 3개월 원비를 결제했다. 관장님이 더 체험해 본 후 결정해도 된다고 하셨지만 오늘 운동이 너무 힘들었기에 바로 등록을 하지 않으면 나 자신과 타협을 하고 다시 체육관에 발을 디딜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어 과감히 카드를 내밀었다. 운동을 끝내고 관장님께서 처음에 이렇게 끝까지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면서 독려해 주셨고 나 자신도 해냈다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내가 이렇게 얼굴에 땀이 많은 체질인지 처음 알았다. 과격하고 힘들었지만 너무나 뿌듯한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뱃살을 빼보려는 생각으로 체험을 했지만 그보다 더 크고 귀한 것을 앞으로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운동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리가 굉장히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같이 운동을 한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성 회원분께 말을 걸었다.
"얼마나 다니신 거예요? 발차기 자세가 너무 멋지세요!"
"저는 오래 다녔어요. 큰 욕심부리지 않고 내 몸에 맞게 운동하면 꾸준히 다닐 수 있어요!"
앗! 나는 같이 운동하는 파트너 코치님께 민폐가 될까 봐 욕심을 부리며 운동을 했는데 오래 다니려면 일단 욕심을 버려야 되는구나! 내 몸 상태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나이므로 컨디션에 맞게 운동을 해야겠다. 관장님도 나보고 승부욕이 있는 것은 좋지만 욕심을 부리다 부상을 입으면 오히려 자신에게 손해이기 때문에 이 점을 조심하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다른 사람들처럼 잘하기 위해,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 이 나이에 큰일이 날 수 있으므로 과욕은 삼가고 꾸준히 운동에 집중해야겠다. 영화 주인공 같은 드라마틱한 변화를 바라지는 않지만 운동을 통해 좋은 에너지를 얻고 그 좋은 에너지를 가족과 일상에 잘 전달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는다. 어딜 가나 인생의 교훈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