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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08. 2023

루인 바(Ruin Bar)

부다페스트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인터넷 조사에 따르면 물가가 저렴하다고 했고 사진을 검색했을 때 국회의사당이 예뻐서였다. 하지만 예상보다 이 도시는 너무 훨씬 더 아름다웠다. 유럽 하면 딱 떠오르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건물들로 늘어선 도시 중심부를 따라 현대적이고 트렌디한 예쁜 커피숍, 레스토랑, 바들이 가득했다. 가격은 저렴하고 음식도 맛있고 사람들 모두 친절했다. 환율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이 3,000원 미만이었고 레스토랑에서 주문한 로제와인 한 잔 가격도 3,000~4,000원 정도였다. 슈퍼에서는 로제와인 한 병을 한 잔 가격에 살 수 있었다. 달지 않고 드라이하면서 상큼한 과일 맛이 부드럽게 혀를 감싸며 목으로 넘어갔다.


독일에서 함께 쾰른 크리스마스 마켓에 갔던 롤른과 제스가 부다페스트에서 가봐야 할 괜찮은 커피숍과 레스토랑, 바 목록을 정리해서 보내주었다. 부다페스트에는 독특하게 ‘루인바(ruin bar)’가 많았다. 영어의 ‘ruin’이란 명사로는 ‘붕괴, 몰락, 파산, 파탄’이라는 의미이고, 동사로서는 ‘폐허로 만들다, 파산시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이다. 이름과 같이 인테리어 디자인이 꼭 폭탄 맞고 폐허가 된 건물 같은 느낌을 주는데, 그 폐허 건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골동품이나 빈티지 아이템을 조화롭게 배치해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도록 멋지게 공간을 연출하였다. 

한 번은 대표적인 헝가리 루인펍인 심플라 케르트(Szimpla Kert)라는 곳에 갔다. 이곳은 ‘바’라고 해야 할지 ‘클럽’이라고 해야 할지,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독특한 문화 공간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가장 중심이 되는 큰 무대가 하나 나타났고 2층까지 층고가 뚫려 있었다. 그 직사각형 무대를 둘러싸고 있는 2층 난간에 사람들이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보이는 구석에 바가 있어서 진토닉 한 잔을 주문하고 그 주 무대를 따라 안 쪽으로 들어가 보니 디제이가 곡을 연주하고 있는 뒤쪽에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이곳은 천장이 있어서 방 같은 느낌을 주었고 환한 불빛의 주 무대와 달리 붉은 조명으로 분위기가 확 달랐다. 공간 한가운데 폐차가 한대 놓여 있었고 그 주변으로 사람들이 앉아서 음악을 즐기거나 서서 춤을 추기도 했다. 

이번에는 2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철제 난간과 연결된 좁은 계단을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공간을 지나니 이번엔 와인바가 나타났다. 이곳은 좀 가라앉은 분위기로 음악 소리도 조용하고 옆 사람 말소리도 잘 들렸다. 무대를 중심으로 모든 공간이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와인바를 지나 문을 하나 열고 나가니 천장이 없는 바깥이 광장처럼 나타났고 사람들이 이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마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는 공간인 것 같았다. 나는 이곳에서 여러 나라의 사람들을 만났는데 화장실에서 만난 영국인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부다페스트는 비행기 티켓도 저렴하고 트렌디한 바도 많고 코로나 규제가 아주 심하지 않아 주말에 놀기 위해 부다페스트로 자주 온다고 했다. 사실 유럽은 나라 간의 사이가 많이 멀지 않고 비행기 티켓 가격도 저렴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주도 놀러 가듯이 유럽 안에서 쉽게 놀러 다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영국에서 부다페스트로 오는 편도 비행기 티켓을 5만 원에 구입했다고 했다.


우리는 또 다른 루인펍(ruin pub)에 가 보았다. 인스턴트 포가스(Instant-Fogas Complex)라고 하는 곳인데, 루인펍이라고 검색했지만, 이곳은 사실 클럽에 가까웠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끝도 보이지 않는 줄에 합류해,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줄 서 있는 동안 우리 바로 앞에 있었던 헝가리 사람, 도미니크과 친해져서 클럽 안에 들어가서도 같이 놀았다. 줄을 앞뒤로 선 사람들과 한 시간 동안 이야기하다 보니 모두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 많은 유럽에서 썰물처럼 밀려 들어온 외국인들이었고 전 세계 젊은 친구들은 죄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모여있는 것 같았다. 이곳은 주 무대 이외에 각기 다른 스타일의 곡을 연주하는 방이 7개 넘게 있는 규모가 어마어마한 클럽이었고 방과 방을 연결하는 곳곳에 바가 있고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들도 마련되어있었다. 나중에 조사를 해 보니 이곳은 한 번에 2,000명의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문화 복합 공간이었다. 발 디딜 틈도 없는 엄청난 인파였다. 다른 음악이 나오는 방 사이를 요리조리 지나다 보면 클럽 안에 담배를 피울 수 있도록 건물들로 빙 둘러싸인 광장 같은 공간이 나오는데 이 공간만 해도 모여있는 사람이  300명은 넘어 보였다. 

아마도 코로나19로 1년 반이나 넘는 시간 동안 각종 규제에 답답했던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자유를 분출하는 것 같았다. 클럽 입구에서 보여주고 들어온 백신증명서라는 작은 종이 하나가 안전장치로 작용하여 그들과 나를 자유롭게 하였다. 


나는 루인 카페나 루인 바와 같은 문화 공간이 참 재미있었다. 어찌 보면 쓰레기 같기도 한 잡동사니들을 벽에 덕지덕지 붙여 놓았는데 인테리어가 이상하게 멋져 보였다. 마치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제 삼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새로운 공간들이 펼쳐지는데 이 모든 것이 연결된 것이 신기했다.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곳에 40대인 내가 가면 물을 흐린다는 이유로 쫓아내는 우리나라와 달리 아무도 나를 쫓아내지 않았다. 이곳은 나라도, 나이도, 성별이나 언어도 다른데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다름이란 것이 이렇게 조화되었을 때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독특한 문화공간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역사를 좋아해서 역사를 이야기해 주는 유튜브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는 편이다. 어려서는 관심이 없었는데 나이 들수록 옛날이야기가 재미있었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는 여성의 지위도 남성과 비교했을 때 꽤 평등하고 외국인에게도 관대하고 외국 사신이나 상인들과 왕래도 자유롭고 ‘다름’이 이 땅에 공존하고 섞이면서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시나메이다.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사산조 페르시아는 고대 페르시아와 다른 아리안계 제국이었다. 이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었는데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슬람 종교 세력이 조직된 후에 사산조 페르시아에 쳐들어가서 결국 651년에 나라가 멸망하게 된다. 나라가 망할 때쯤 왕자 페로즈는 페르시아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중국 당나라로 도망갔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페르시아인을 탄압했고 페로즈 왕자의 후손인 아비틴은 신라로 도망간다. 그는 신라에 도착한 후 신라왕 타이후르(태종 무열왕)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며 그와 친구가 된다. 그리고 아름다운 신라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는 신라-페르시아 연합군을 결성하여 신라에 침입해 온 중국군까지 물리친다. 전쟁 후 아비틴은 신라공주 프라랑과 결혼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신한 프라랑은 꿈을 꾸게 되는데 꿈에서 아비틴과 그녀의 아들이 폭군인 ‘자하크’을 물리치고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을 재건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된다. 꿈 이야기를 들은 아비틴은 신라 국왕에게 페르시아로 돌아가겠다고 청했고 프라랑도 남편을 따라 함께 간다. 하지만 아비틴 왕자는 자하크의 함정에 빠져 처형당하고 그와 프라랑의 아들인 페리이둔은 엄청 고생한 끝에 결국 자하크를 사로잡은 뒤 예언처럼 페르시아의 영웅이 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이야기’이지만 처용무에 나오는 인물, 원성왕 괘릉의 석상 등을 보았을 때 우리나라와 중동 나라들과 왕래가 활발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들어오면서 금지되는 것이 많아졌다. 유교 사상이 좋은 말씀도 많지만, 남녀 차별이라든지, 신분의 차별 등이 만들어 놓은 차별문화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답답할 때가 많다. 한국이 아무리 발전했다고 하지만 같은 성을 사랑하는 게이들에 대한 차별, 외모 차별, 학벌 차별, 외국인에 대한 차별 등이 아직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백인들은 우대하는 경향이 있지만 동남아시아에서 일하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흑인들에게 대하는 태도는 아직도 그리 좋아 보이지만은 않아 보인다. 3년 전 남해 보리암에 갔을 때 산 정상에서 만난 영국인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녀가 말했다.

“지금은 일을 하고 있지만 한국에 와서 직업을 찾기 너무 힘들었어요. 대학도 나오고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충분한 교육을 받았지만 이력서를 내도 아무도 저를 고용하지 않았어요. 취업하는데 3개월 걸렸는데 아마 내가 흑인이라서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다양성이야말로 문화를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서울을 보면 그래도 많이 열려있고 나름대로 ‘다름’을 끌어안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지금 보다 조금만 더 시민들의 의식이 성장하기를, 다름을 수용하고 더 발전되는 대한민국이 되기를 마음속으로 조그맣게 응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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