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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Nov 07. 2023

나 자신에게 하는 선물

 


나는 캐나다 사람과 결혼했다. 그의 이름은 윌이고 한국에서 나와 함께 살고 있다. 시어머니 입장에서는 10,600km 떨어진 곳으로 아들을 보내야 했다. 애지중지 키운 아들인데 보고 싶을 때 볼 수가 없다. 스카이프로 화상 전화를 하지만 그래도 직접 만나는 것과는 다르다. 몇 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가족 행사 때문에 가끔 보기는 하지만 우리는 캐나다에 갈 때마다 너무 바빴다. 2주나 휴가를 내고 캐나다에 가도 가족들과 친구들을 점심, 저녁으로 만나도 못 만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시간이 부족했다. 어머님과 만나는 시간은 길어야 이틀 정도였다. 

코로나19로 도시와 국경이 봉쇄되어 1년 반이 넘는 고립된 시간을 겪으신 어머님은 아들이 많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백신이 개발되면서 국경의 출입이 가능해지자 우리를 캐나다로 초대하셨다.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에 가족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싶다고 하시면서 비행기 티켓을 보내주셨다. 

 이번에 캐나다에 가면 어머님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자고 윌과 이야기했다. 그리고 캐나다에 갔다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유럽을 여행하기로 했다.

 우리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어머니께서 살고 계시는 지역은 캐나다 소도시인 킨카딘(Kincardine)이라는 곳이다. 킨카딘은 토론토 온타리오주 남동부의 휴양도시로 휴론 호수를 끼고있으며  인구 11,000명 정도 사는 작은 도시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토론토에서는 차로 3시간 정도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다. 킨카딘에 있는 휴론 호수는 우리나라 남한의 면적보다 조금 작은 규모이다. 너무 거대해서 파도까지 치는데 파도가 셀 때는 서핑도 한다고 한다. 모르고 보면 전혀 호수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어머님을 만나기 위해 캐나다로 갔지만 개인적으로 조용한 동네인 킨카딘에서 쉬고 싶었다. ‘40년 넘는 세월 동안 치열하게 살았으니 좀만 쉬었다 가자’라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부터(엄밀하게 말하자면 고등학교 때도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끊임없이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오랫동안 뭘 하지 않고 쉰 적이 별로 없었다. 


 나는 킨카딘에서 아침에 알람을 맞추지 않고 일어나서 시어머니께서 커피 머신에 내려놓은 신선한 커피를 한잔 마시며 갓 토스트 한 식빵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과일과 함께 먹었다. 막 구워진 빵 냄새는 영혼까지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아침 내내 책을 읽고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나서 시어머니의 강아지 말리부를 산책 시켰다. 휴론 호수 한 자락을 따라 조용하게 나 있는 오솔길로 총총거리며 말리부가 내 앞을 걸어갔다. 하얀 솜 뭉치가 굴러가는 듯한 말리부의 뒷모습을 보며 걸을 때 참 기분이 좋았다. 

오솔길 옆으로 줄지어 있는 평화로운 집들을 지나 시원하게 파도치는 해변 까지 가면 가슴이 탁 트였다. 잔잔하고 반짝거리는 호수를 바라보면서 잡다한 생각을 정리하거나 때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렸다. 주로 내가 본 평화로운 킨카딘 풍경을 펜으로 쓱쓱 그리고 물감으로 색칠했다. 너무 대충 그렸다고 생각했고 그다지 그 그림이 마음에 들지도 않았지만, 나중에 내가 그린 그림들을 바라보니 이상하게도 그때 고요한 내 심정이 느껴졌다.

노을이 질 무렵이면 말리부를 데리고 호숫가로 한 번 더 나갔다. 운동을 하지 않아 걷기를 운동 삼아 나가는 것이지만 노을이 너무 아름다워서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노을은 언어로 나열하면 유치해질 만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빛을 풍부하게 드리며 하늘을 채색했다. 그리고 매일 한 달 넘게 노을 지는 호숫가를 걸으며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구름이 한 점도 없는 날은 노을이 그냥 주홍빛이다. 해가 호수의 수평선 위로 깔끔하게 넘어가면 하늘 위는 군청색, 수평선 위는 주홍색 이렇게 두 가지 색이 수평선을 기준으로 그라데이션 효과를 내며 섞인다. 구름이 있는 날은 사정이 다르다. 구름이 많이 있는 날은 호수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 빛이 구름에 반사되어 이루 말할 수 없는 색들이 서로 뒤엉켜 그야말로 그 어떤 명화보다 더 아름다운 작품을 탄생시킨다. 구름이 매일 달라서 이 완벽한 작품은 매일 다르다. 

‘노을의 빛깔은 구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구나!’

아름다운 노을을 볼 때 눈을 통해 들어간 시각적 정보가 뇌를 통과하고 사랑스러운 감정으로 바뀐 뒤에 심장으로 들어가서 온몸으로 사랑의 에너지를 전달한다. 그럼 다시 그 에너지는 내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무언가를 끄집어내 몸 밖으로 방출시킨다. 온몸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저녁에 시어머니의 남편인 폴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었다. 시어머니는 2016년에 재혼하셔서 나는 시아버님이 두 분 계신다. 폴은 식구들을 위해 저녁 식사를 자주 준비해 주었다. 그릴로 구운 연어와 아스파라거스, 어떤 날은 구운 치킨 가슴살과 삶은 브로콜리와 감자, 그리고 어떤 날은 등심 스테이크와 으깬 감자 그리고 각종 야채 구이를 요리 해 주었다. 특히 그는 스테이크를 기가 막히게 잘 요리한다. 저녁을 먹을 때 가끔 와인을 마시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주로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일어나는 일들, 가족들 이야기, 역사 이야기, 읽었던 책 이야기들 등을 공유하며 서로의 의견을 말하고 경청하는 시간을 가졌다. 

가족들과 대화를 통해 나는 또 많이 배웠다.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나면 나의 지식과 생각들이 확장됨을 느낀다. 책에서 느꼈던 대목을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의견을 이야기해야 할 때면 조리 있게 설명하기 위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개념들을 한가지로 모았다. 그래서 내 생각들이 말하면서 정리되었다. 그리고 그 생각에 대한 남의 의견도 들으면서 내가 어떤 사건을 혹시 편협한 시선으로 혹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가 성장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에게 1년이라는 시간을 선물로 주었다. 일을 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시간. 그동안 모아왔던 적금을 몽땅 해지했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지나온 날을 돌이켜 보며 미래의 멋진 내가 될 수 있도록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혼란스럽고 힘들어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자신에게 시간을 선물 해 주라고 말해주고 싶다. 얼마 동안 공백을 가질 것인지, 사유의 시간은 본인이 정하면 된다.

나는 필라테스 운동을 하며 신체 코어에 힘을 기르듯이 킨카딘에서 마음의 근육을 단단하게 키웠다. 여행을 다니면 사실 엄청 바쁘다. 숙소도 예약해야 하고 사진도 찍어야 하고 여행지 정보도 검색해야 하고 할 일이 정말 많다. 킨카딘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공백의 시간을 가지기 좋았다. 첫 여행지가 이곳 킨카딘이어서 다행이었다.

어린 시절 풍족하지 않게 살았고 그래서 나만 살기 바빴다. 나 살기 바빠 죽겠는데 누굴 위한단 말인가? 이웃을 배려하는 더 좋은 사람, 우리 한국 사회가 더 좋게 변할 수 있도록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 하지도 않았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자 돈을 더 모아서 여행도 좀 다니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살고 싶었다. 그러다가 여행길에 오른 후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여행은 그런 것이었다.

사실 1년은 긴 시간이다. 긴 여행을 결정하고 적금을 해지하면서도 두려웠다. 그동안 가득 채웠던 것들을 선뜻 비울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비우고 나니 다른 것들이 채워졌다. 한국에 돌아오면 큰일 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는 강해졌다. 비우면 비울수록 이상하게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어느 유명한 철학자가, 유명한 교수님이 이렇게 살라고 하더라’ 그런 말에 휘둘리지도 않게 되었다. 내 인생은 그 사람이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들의 말을 참고 할 필요는 있다. 참고 하면서 내 길을 가려면 내가 누구인지 먼저 알아야 하고 그러려면 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잠깐 쉬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긴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잠깐 멈춘다고 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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