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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 소피아 Dec 26. 2023

로마로 떠나는 기차


포지본시에서 달콤한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그리스 아테네로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 토론토에 사는 윌 친구 중 한 명에게 우리의 장대한 여행 계획을 말해주었는데 그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어머니가 그리스 테살로니키에 별장이 있는데 여름에 그리스의 어머니 별장에서 만나자!" 

 튀르키예에서 바로 그리스로 가는 것이 가까웠지만 친구의 휴가 스케줄에 맞추려고 이탈리아에서 2주를 보내면서 그들을 기다렸다. 


포지본시에서 아테네로 가는 비행 편을 알아보는 건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작은 소도시에서 꿀맛 같은 휴식을 맛볼 수 있지만 어디 이동하려면 여간 불편하지 않을 수 없다. 근처에 피렌체, 볼로냐, 피사에 공항이 있었지만 비행 편 시간이 모두 맞지 않았다.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항공편은 로마에서 떠나는 저녁 비행기였는데, 오전에 포지본시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피렌체로 버스로 이동,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 기차를 탄 후에 테르미니역에 내려서 다시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로 갈아타면 다빈치 공항에 저녁비행기 탑승시간에 맞게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야 가능한 이야기이고, 이 중 하나라도 놓치거나 늦어지면 안 된다.

 잔뜩 긴장한 채 모든 것이 순조롭길 바라며 오전 9시쯤 체크아웃을 하고 1시간 정도 버스로 피렌체 역에 도착해서 로마행 기차를 기다렸다. 커다란 전광판에 기차에 대한 정보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했지만 로마행 열차는 몇 번 플랫폼으로 가야 할지 나오지 않았다. 우린 바닥에 주저앉아 전광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전광판은 마침내 열차 떠나기 5분 정도 남겨놓고 17번 플랫폼으로 가라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17번 플랫폼을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고 역에 있던 한 직원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그 직원은 손가락으로 지금 앞에 서 있던 한 기차의 뒤쪽 끝을 가리키며 이 기차 뒤에 있다고 했다. 우리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기차를 따라 뒤쪽으로 이동했다. 짐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기차를 놓칠까 봐 바삐 걸어갔다. 정확한 거리는 모르겠지만 100미터는 걸은 것 같았다. 마침내 17번 플랫폼에 도착했는데 그곳에 있는 기차에 모든 불이 꺼져있었고 어떠한 손님도 없었다. 미국에서 온 60대쯤 되어 보이는 노년의 커플만이 어리둥절 해 하면서 기차 안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2분 뒤면 출발인데 이상했다. 우린 그 커플에게 물어보았다.

“실례지만 이 기차가 로마로 가는 게 맞나요?"

“저희도 플랫폼에서 17번으로 가라고 해서 왔는데 기차에 불도 꺼져있고 좀 이상하네요.”

우린 다시 기차 주변에 있던 전광판을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플랫폼이 2분을 남겨놓고 12번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 아닌가? 

“뭐? WHAT???  12번 플랫폼은 지금 왔던 거리만큼 다시 돌아간 다음 기역자로 꺾어서 몇 미터를 더 가야 하는데? OH MY GOD!"

지금 뛰어가도 기차를 놓칠 위기였다. 우리는 이 기차를 놓치면 비행기까지 놓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젖 먹던 힘까지 다 해 힘껏 뛰기 시작했다. 윌은 그래도 운동선수 출신이었다고 15kg의 가방을 메고 내가 끌고 있는 23kg 케리어를 손에 쥔 채 거의 100미터를 10초 정도로 전력질주를 했고 나는 컴퓨터와 다른 짐이 들어있는 백팩 두 개를 앞, 뒤로 둘러매고 그의 뒤를 허덕이며 쫓아갔다. 숨이 턱까지 차서 도저히 뛸 수가 없을 지경에 한번 서서 거친 숨을 내몰아 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힘이 다 빠진 미국인 커플은 얼굴이 핏기하나 없이 울상을 지으며 내 뒤를 멀찌감치 쫓아 뛰어오고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러닝머신 위에서도 그렇게 뛰어본 적이 없는데 뛰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미친 듯이 달려야 했다. 사람이 급박한 순간에 도달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는데 윌은 그 번개맨쯤 되는 초인이 되어 이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먼저 12번 플랫폼에 도착해 역무원에게 기차를 출발시키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며 우리를 위해 기차를 잡아주었다. 나와 윌, 미국인 커플이 기차에 발을 올려놓자마자 자리에 앉기도 전에 기차가 출발했다. 미국인 커플 중 여성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Why did they do this to us?”  (이 사람들 우리에게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기차를 잡느라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은 윌은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자리에 앉아 로마까지 가는 3시간 동안 숨을 골라야 했다.

한국에 돌아와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해 주자 친구도 로마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정말 기차를 놓쳤다고 했다. 기차가 떠나는 시간에 대한 정보가 부정확했기 때문에 명백한 기차역 관계자들의 실수였지만 역 측에서는 다시 기차표를 구매하고 놓친 기차표는 환불 신청을 하라고 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다시 표를 구매하고 한국에 돌아와 기차표 환불에 관련된 메일을 1년 동안 보냈지만 이탈리아에서 환불에 대한 대처는 순조롭지 않았고 친구는 그 돈을 포기해야만 했다. 김영하 작가의 시칠리아로 떠난 여행기를 읽었을 때 기차에 관한 에피소드를 보긴 했지만 파업도 있었고 그때 상황이 그랬으려니 싶었다. 하지만 나와, 친구의 경험 그리고 김영하 작가의 에피소드까지 겹쳐지니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것과 이탈리아의 기차역은 관광객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다.


우리가 악착같이 기차를 잡아 탄 덕에 다행히 그리스 아테네로 순조롭게 입국할 수 있었다. 이렇게 로마로 떠나는 기차는 이탈리아에서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고 두고두고 이때를 떠올리며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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