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옥수수와 나 - 김영하

by 무명

자신을 낟알로 생각하는 정신병자가 있었다. 환자는 정신과 의사에게 닭이 자신을 잡아먹을 것만 같다는 고민을 토로한다. 타이르다 지친 의사는 환자에게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당신은 낟알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그러자 정신병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도 알아요. 하지만 닭도 그 사실을 알까요?”


이 이야기는 슬로베니아의 파격적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이 즐겨 인용하는 동유럽의 농담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상문학상을 받은 김영하 작가의 단편 소설 『옥수수와 나』에서 서두로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는 다음과 같다.


한 정신병원에서 철석같이 스스로를 옥수수라 믿는 남자가 있었다. 오랜 치료와 상담을 통해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겨우 납득한 이 환자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귀가 조치되었다. 그러나 며칠 되지도 않아 혼비백산 병원으로 되돌아왔다.

“아니, 무슨 일입니까?”

의사가 물었다.

“닭들이 나를 자꾸 쫓아다닙니다. 무서워죽겠습니다.”

환자는 몸을 떨며 아직도 닭이 자기를 쫓아오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면서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의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심시켰다.

“선생님은 옥수수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 이제 그거 아시잖아요?”

환자는 말했다.

“글쎄, 저야 알지요. 하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소설집 '오직 두 사람' 속 소설 『옥수수와 나』 -113쪽


소설 『옥수수와 나』는 시작하자마자 위의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본래 소설의 이야기가 시작한다. 언젠가 이상문학상이라는 소리를 듣고, 읽었으나, 잘 이해하지 못해서 읽기만 하고 넘어갔던 소설이 이 소설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살면서 가끔 위의 농담과 소설의 전체적인 이야기를 곱씹어보았는데, 그러다가 불현듯이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내용은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소설 내용은 슬럼프를 겪는 작가 박만수가 주인공이다. 소설을 낸 적은 있지만, 지금은 글을 전혀 쓰지 못하고, 쓰지 않고 있는 작가 박만수는 출판사와의 계약 때문에, 그는 소설을 써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사에서 편집자를 하는 전처 수지가 찾아와서 새로 온 사장이 계약 이행을 요구하고 있음을 알린다. 출판사 사장은 박만수를 찾아와서는 자신이 팬이었다고 소개하면서, 흥분해서는 박만수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박만수가 글을 쓸 수 있게 뉴욕의 집을 빌려준다. 그 과정에서 박만수는 출판사 사장과 전처 수지의 관계를 의심하고, 글을 쓰지 않으면 계약 불이행이고, 글을 잘 쓰면 그 둘을 배불리 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글을 쓰되,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글을 쓰자고 생각하며, 박만수는 뉴욕에 사장의 집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출판사 사장의 별거 중인 아내 박영선이 있었고, 영선은 너무나 황홀한, 대단한 미모와 아름다운 나신을 가진 여성이었고, 그들은 섹스한다. 그들이 관계를 갖고 나자, 갑자기 박만수는 소설의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왔고, 그 자리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쓰고, 영선과 섹스하고, 절세미인과 섹스, 광적인 집필만을 반복적으로 잠도 자지 않은 채 열흘 동안 내내 지속한다. 그렇게 소설의 집필을 어느 정도 이루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니 눈앞엔 출판사 사장이 있다. 사장은 극도로 분노한 상태로 총을 겨누며 죽일 듯이 협박한다. 박만수는 소설 집필을 핑계로 상황을 회피해 보려 소설을 사장에게 보여주지만, 사장은 소설의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분노한 사장은 총을 겨눈 채 죽고 싶지 않으면 건네는 약을 먹으라고 협박한다. 박만수는 건네받은 약을 먹고 기절했다가 깨어난다. 깨어나서 보니, 사장과 영선의 모습이 점차 볏이 자라나고, 입도 부리로 변하며 닭으로 변하고, 박만수는 두려움을 느낀다. 박만수는 그저 떠오른 문장을 왼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나는 옥수수가 ……


소설 『옥수수와 나』의 줄거리는 위와 같다. 난 지젝의 농담이 소설 속 내용과 직접 연결되는 것이라 생각이 들진 않는다. 그저, 소설의 내용을 읽어가는 좋은 지침을 작가가 제시해 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지젝의 농담이 의미하는 바를 고찰하는 건 중요하다. 이는 작가가 박만수 스스로 옥수수가 아님을 외게 하는 장면을 넣음으로써, 지젝의 농담이 의미하는 바가 소설의 고찰과 직접 연결되는 것임을 알렸다. 따라서, 난 소설을 이 농담을 근간으로 이해해 보았다.

먼저 지젝의 농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일까. 우리는 옥수수 낟알일까. 인간일까. 이는 나는 무엇일까? 란 질문의 대답인데, 서두의 남자는 자신이 옥수수에서 사람임을 명확하게 인지한다. 나는 무엇일까란 우리의 정체성을 묻는 아주 대표적인 철학적 질문인데, 남자는 그 정체성을 사람이라 확실하게 인지한다. 즉, 자신의 정체성을 내면의 완성으로 결론을 내어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닭이 내가 사람임을 모르고 먹으려 든다. 결국, 우리가 스스로 옥수수가 아님을 알아봐야, 닭이 그걸 알지 않으면, 난 여전히 닭에게 공격받는 것이다. 닭이 아는 것이 중요하다. 닭은 타인이다. 지젝은 이로써 지적했다. 전통적 철학은 우리에게 내면의 갈고닦음을 통해서 정체성의 완성을 요구하지만, 지젝은 사실 우리의 정체성에는 타인의 존재가 관여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자신의 정체성에 타인이 관여한다는 것은 작가 김영하도 자신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도 언급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여행의 이유』


타인의 인정이 우리의 정체성에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타인의 영향력을 작가는 이미 인지하고 있었고, 이를 지젝의 농담을 통해서 강화하고, 이어 소설에 반영한 것이다.

소설 속 화자, 박만수는 소설가다. 소설가의 정체성은 소설을 쓰는 것. 그러나 박만수는 소설을 쓰지 않는다. 이전엔 썼었지만, 슬럼프라는 핑계로 그는 소설을 쓰지 않고, 쓰려는 노력도 딱히 하지 않는다. 정체성을 놓아버린, 잃어버린 상태이다. 전처와 출판사 사장, 그리고 사회적 상황은 전부 박만수에게 소설을 쓰라고 요구한다. 정체성을 찾으라고 독촉한다. 그는 여전히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소설을 쓰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혹시 지금 뭐 쓰고 있는 거 없어? 응?”

이렇게 물을 때는 영락없이 필자 관리하러 온 편집자다.

“글쎄, 하나 있긴 한데, 아직은 비밀이야.”

“비밀이라는 것 보니까 뭔가 괜찮은 거 쓰고 있나 봐?”

“뭐 다 써봐야 알지. 열심히 쓰고 있기는 해.”

모든 작가는 편집자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한다.

(중략)

구상을 편집자에게 말할 때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초현실주의를 슬쩍 언급해 주는 게 좋다. 그러면 편집자는 자기 마음대로 스토리를 상상하기 시작하고 곧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한다.

“재밌을 것 같은데?”

전처까지도 이렇게 넘어가는 것 보라. 이게 바로 마술적 리얼리즘의 마술적이면서도 리얼한 힘이다.

소설집 '오직 두 사람' 속 소설 『옥수수와 나』 - 120쪽



박만수는 소설을 거짓으로 대한다. 이후에도 그는 소설을 악의적 용도로 이용하는 장면이 계속 나온다. 소설을 쓰는 게 사장과 전처에게 이롭다고 생각해, 박만수는 소설 쓰기를 꺼리고 있지만, 계약의 굴레에 의해 소설을 써야만 하는 상황에서 친구 철학과 만나 다음과 같이 대화한다.


“그럼 이러는 건 어때?”

“어떻게?”

“사장이 도저히 제정신으로 출판할 수 없는 난해하고 어지러운 소설을 쓰는 거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같은 걸 써버려. 한 천 페이지쯤 되고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고 주제도 알기 힘든 소설 말이야.”

“『율리시스』에는 줄거리도 있고 분명한 주제도 있어.”

“사실 난 안 읽어봤어. 주제가 뭔데?”

“지질한 중년 남자의 어지러운 성적 몽상.”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하고 주제가 같잖아?”

“그렇지. 그게 사실 전부야. 『율리시스』를 음란물로 판정했던 미국판 사는 뭘 아는 놈이었어.

(중략)”

“거꾸로 사장을 딜레마로 몰아넣는 거야. 역전 드라마지. 너야 원고를 넘기면 계약은 지키는 거잖아.”

“음. 무려 천 페이지에 달하는 어지럽고 음란하고 실험적이면서 해체적인 소설이라.”

“바로 그거야! 아마 절대로 출판 못할 거야. 하면 낭패고. 요즘 종잇값도 많이 올랐다는데.”

소설집 '오직 두 사람' 속 소설 『옥수수와 나』 - 140, 141쪽


결국 박만수는 난해하고, 성적이며 이해할 수 없는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소설을 그의 전처와 사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속되게 말해 엿 먹이기 위해서 이용하려 한다. 소설은 소설가의 정체성임에도, 그는 그 정체성을 가볍게 여기고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써 대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율리시스』를 그저 음란물로 여긴다. 그에게 소설은 수단이며, 율리시스 같은 고전 명작마저도 음란물에 불과한 것이다.

이후 뉴욕으로 간 박만수는 영선과의 섹스 이후, 뮤즈를 얻어 광적인 집필을 해내는데, 소설가가 소설을 씀으로써 소설가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섹스로 물들어 있어 음란하고, 그가 소설을 쓰는 의도는 지저분하고 천하다. 천박하다. 이러다 보니 타인의 인정을 받기에는 부족한 정체성이 된다. 사장이 그의 새로 집필한 소설을 읽고 난 반응은 다음과 같다.


“박작가.”

“네?”

“도대체 이게 무슨 얘기요?”

“왜요? 재미가 없나요?”

“아니, 재미가 없지는 않아. 근데 이게 무슨 얘기냐고.”

(중략)

“자, 그건 잊어버리자고. 어차피 살아서 돌아가지도 못할 텐데 뭘. 이 소설에 대한 내 생각은 이래. 이건 쓰레기야. 나를 엿 먹이려고 쓴 글이란 말이지. 도대체 이런 소설을 쓴 저의가 뭐야?”

(중략)

“소설에 무슨 줄거리가 있어야 다음이 궁금하지. 읽을 땐 그럭저럭 읽히는데 덮고 나니 다음이 하나도 안 궁금해.”

소설집 '오직 두 사람' 속 소설 『옥수수와 나』 - 157, 159, 162쪽

사장은 기본적으로 그의 새 소설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고 있다.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박만수 스스로는 완성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완벽히 인식한다.


“그러니까 이 원고는 작가 박만수가 쓰는 것이 아니라 저의 손을 빌려, 아기 예수가 성모마리아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오셨듯이, 이 세상에 지금 오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씀드려 기분이 나쁘실 수 있는데, 그렇죠, 선승들 같았다면, 한 소식을 했다, 뭐 그런 식으로 말들 했겠죠.”

소설집 '오직 두 사람' 속 소설 『옥수수와 나』 - 160쪽


박만수는 자신을 이야기하는데 예수까지 끌어들인다. 참으로 자존감 높고 당당하지 않은가. 그 스스로 생각하는 내면은 예수와 선승까지도 도달했다. 다소 거만하기까지 하다. 종전에 고전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완벽한 내적 성숙의 도달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정체성 확립의 과정이 천박했고, 사장으로 대비되는 타인의 인정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는 결국 소설의 마지막에 달해서 주변의 인물을 닭으로 보기 시작하고, 스스로 옥수수가 아님을 계속 되뇌게 된다.

……

마침내 아득한 의식의 안개를 뚫고 하나의 문장이 서서히 형체를 드러낸다. 나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

나는 옥수수가……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소설집 '오직 두 사람' 속 소설 『옥수수와 나』 - 169쪽


그렇다. 그는 스스로 완벽한 정체성의 확립을 이룩해 냈지만,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한 옥수수가 되었다. 우린 정체성의 중요성에 대해 오랜 시간 끊임없이 계속 들어왔고, 그래서 항상 내면의 갈고닦음을 강조하지만, 그것에 가하는 타인의 중요성은 들어본 적이 흔치 않다. 작가는 그런 타인의 존재에 대해, 타인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이 소설을 집필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작가의 생각은 소설의 마지막 문장.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에서 확인된다. 스스로 옥수수가 아님을 되뇌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젝의 농담이 강조한 타인의 인정과 작가 김영하가 말하는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 우리의 정체성이 순전히 나만의 문제는 아닐 수 있음을 이해한다. 이는 물론 내면의 완성도 중요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변을 신경 써야 하고, 그들의 이야기에도, 그들이 우릴 바라보는 것에도 우린 신경을 써야 한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우리가 내적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할지라도 주변의 인정이 남아있고, 그것은 우리의 손에서 벗어나는 문제임을 이야기하는 걸까. 무엇이 되었든,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독자인 우리의 몫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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