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계속되는 번 아웃으로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임신이라는 돌파구를 찾았다. 리프레시 휴가라는 제도가 있긴 하지만 아직 연차가 되지 않는 나에겐 남의 일이다. 내가 휴직을 할 수 있는 건 난임휴가와 육아휴직뿐이다. 결혼도 했겠다, 내 집도 마련했겠다, 아주 여유롭진 않아도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상황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바로 배란일을 계산했고 판단대로 실행했다. 그 후 생리를 2주 동안 안 했다. 임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들뜬 마음에 가족들에게 임신인 것 같다고 떠들었다. 생리주기도 규칙적이었기 때문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해봤다. 너무나 명확하게 한 줄이었다. 초기에는 테스트기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서 회사 근처 산부인과까지 갔다. 역시 임신이 아니라고 했다. 실패한 기분이 들었다.
주변에 먼저 임신한 선배들은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면 더 안 된다고 아무 생각이 없어야 선물처럼 아이가 온다고 했다. 그래, 승진이나 빨리 하자며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승진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내년을 기약하자고 했다.
연말연시 승진 실패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폭음을 하고 가족들과 해외여행까지 다녀왔는데 이상하게 생리를 2주 동안이나 하지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이제 다시 승진을 위해 달려야 하는데?
테스트기를 해보니 명확하게 두 줄이었다. 맙소사, 정말 아기 생각을 안 하니 선물과 같은 아기가 오고야 마는구나. 작년에 임신 테스트를 했을 때와는 내 마음이 아주 달라져 있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되니 첫째로 든 생각은 승진 문제였다.
초음파로 보는 아기의 모습은 점에 가까웠다. 선생님은 아기가 오른쪽 난소에서 나왔다고 했다. 그런 것도 알 수 있다니. 아기에게 미안해졌다. 너를 1순위로 생각하지 못해서 미안해, 선물과도 같은 너를 걸림돌처럼 생각해서 미안해, 축복과 같은 너를 처음 알았을 때 행복감으로 처음 맞이하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승진을 위해 달리는 폭주기관차에서, 순식간에 엄마가 되었다. 지금부터는 아기에 집중해야겠다 결심했다.
솔직히 이러한 마음에는 자포자기도 있다. 승진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걸 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연말에 평가를 받는데 중간에 휴직 들어간 나에게 승진티켓을 줄 리 없다.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고 싶었고 혹시 모를 가능성을 잡고 싶었다. “임산부라고 저를 업무에서 배제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보란듯이 더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남들이 챙기지 않는 부분을 더 챙겨 내가 뱉은 말에 책임을 지려고 노력했다.
결국 나는 승진을 하지 못했고 그대로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직장인 임산부들의 선택지는 포기 아니면 오기다. 혹은 둘 다. 회사 생활과 출산, 육아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매겨질까. 아등바등 버틴 임신 시절이 애처롭게 느껴지면서도 훗날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아 뿌듯해진다. 워킹맘들은 회사에는 억울한 마음과 아기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안으며 그렇게 마음의 저울을 맞추며 산다.
엄마가 되기 위한 도전의 시작은 불순했고 그 과정에서도 나는 지극히 이기적이었다. 아기를 낳은 후에도 나는 이기적인 엄마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평생 아기에게 미안한 짓을 반복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가 되기로 선택했다. 때로는 실패하고 대체로 내 뜻대로 안 될지라도 그 과정에서 나는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어리숙한 어른이 어리숙한 엄마가 되지만 그럼에도 어제보다 한 뼘 나은 엄마가 되는 길로 나아가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