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다. 아기를 낳으면 젖이 돌기 시작한다는 것. 하루에도 몇 번씩 젖이 땡땡하게 차오르면 어떤 방법으로는 빼야 한다는 것. 모유수유가 모성의 상징이며 숭고한 것으로 치부되고는 하지만 실상은 임신, 출산, 육아 중 내게는 가장 고된 일이고, 아기가 먹어주는 한 이 짓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막막한 일이다.
차라리 임신 기간이 편했다. 내 배의 크기와 아기의 안위, 수술 후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던 때. 이미 내 몸은 그 때부터 모유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 몸이 모유를 줄 준비가 돼가는 것을 알았을 때 벼락치기로 모유수유에 대해 연구했다. 모유수유를 공부하면서 가장 신기했던 것이 '아기가 먹는 만큼 모유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아기가 먹는만큼 어떻게 모유가 나온다는 말인가. 이것은 어떤 원리로 이뤄지는 것인가.
초반에는 모유가 생성된 만큼 아기가 빨아주지 못해 가슴이 땅땅해지거나 아기가 먹는 만큼 모유가 생성되지 못해 아기와 나 모두 고통 받았다. 그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견뎌내면 어느덧 아기와 모유의 패턴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간다. 그 때가 되면 적절한 수유텀과 수유량을 아기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 어떤 엄마도 고통 없이 수유를 할 수 없다. 아기가 먹는만큼 모유가 나오는 것은 모유수유를 하는 엄마가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인내에 그 작동원리가 있다.
모유수유를 하는 엄마는 유선염이나 유두의 통증을 항상 달고 있다. 모유수유 안 한다고 이 고통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유수유를 하지 못 하거나 안 하는 엄마도 내 의사와는 달리 자꾸만 나오는 모유를 억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해야한다.
모유수유모에게 가장 힘든 때는 밤이다. 젖이 불어 가슴은 돌덩이가 되었고 심지어는 젖이 줄줄 흐른다. 붙여놓은 수유패드마저도 한껏 수분을 흡수해 통통하게 불어 있다. 곤히 자고 있는 아기를 깨울 수도 없는 그 고독한 고통의 시간.
아기가 배고파 울면 그 순간부터 알아서 젖이 돌아 아기의 입이 닿기도 전에 젖이 뚝뚝 떨어진다. 아기에게 오른쪽을 물리면 왼쪽에서도 미리 젖이 나오기도 한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내 몸은 아기를 배불리기 위해 모든 시스템이 최적화되어있는 걸까 싶어진다.
모유만큼 양가감정을 느끼게 하는 일은 없다. 아기가 모유를 잘 먹어주면 세상에 없던 숭고한 모성애가 생긴다. 그러나 젖을 물리고 있는 숭한 내 모습을 보면 나는 그저 젖소에 불과하구나 깨달으며 우울한 젖꼭지가 되어 버리고 만다.
아기가 모유를 계속 찾으면 내가 아기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엄마라는 존재를 대신할 수 없어 3시간마다 깨어나 아기에게 젖을 물려야 한다.
모유를 줄 수 없는 상황에서 아기가 분유를 잘 먹으면 아기를 굶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안도한다. 그러다가도 이제 엄마의 젖꼭지는 필요없는 것이냐며 또 서운해진다.
모든 과정이 고통이긴 하지만 모유수유의 가장 큰 장점은 아기를 오롯이 내가 키워낸다는 것이다. 내 몸으로 품고 내 몸으로 키워낸 너는 모든 요소가 나로부터 시작된다. 숨결부터 머리털 하나까지 내 몸에서 나온 것으로 만들어진다. 나는 너의 대지이자 너의 하늘이며 너의 공기다.
모유는 할 수 있을 때까지 주는 거야,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쿨한 엄마가 되자고 마음 먹다가도 하루에도 몇 번씩 '단유할까?'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내 젖꼭지만 입에 들어가면 어디 도망갈새라 귀엽고 필사적인 얼굴로 빨아대는 아기를 보면 언제까지고 모유로 아기와 연결되고 싶다.
아기를 낳기 전 날, 열 달을 오롯이 붙어있던 아기와 떨어지는 기분에 너무나 서운했는데 모유수유를 끝내기 전 날에도 아기와 나를 연결하던 무언가를 잃는 느낌에 서운함을 느낄 것 같다.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이 금방 달아날까 서운한 것 투성이다.
가끔은 술이 마시고 싶다. 1년 넘게 참고 있던 술을 한잔 들이키는 쾌감. 그럼에도 아이와 연결되어 있다는 그 느낌에 비하면 이 쾌감은 아무 것도 아니다. 모유를 주기 위해 술이야 더 참을 수 있지.
(냉장고엔 무알콜 맥주를 넣어둔 채...)
모유, 내 의사와는 관계 없이 생겨나 아기와 나를 연결하고 아기를 길러낸다. 나도 모르게 엄마로서의 나를 만들어 낸다. 내 존재 가치가 고작 이것인가 싶다가 내가 이런 것도 할 수 있는가 감탄하게 한다. 아기는 모유를 통해 엄마를 만나고, 나는 모유를 통해 엄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