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극히 하루를 꽉 채워 쓰는 사람이다. 학창 시절부터 회사를 다니는 동안까지, 나의 하루 일과는 굉장히 빡빡했다. 완전한 계획형 인간이라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오늘의 할 일을 정리하는 것이다. 누워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모두 내 계획에 있는 일이라는 말씀.
그랬던 나에게 간만의 방학 같은 시기가 찾아왔다. 바로 출산휴가. 거기까진 참 좋았다. 오롯이 나의 계획으로 가득 차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출산. 내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매일이 시작됐다. 조리원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굉장히 빠듯한데 나는 그 안에서도 최선을 다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아기가 태어난 이후 나의 하루 일정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기가 정한다. 유축을 3시간마다 해야 한다고 해서 다음 유축 시간을 계산하고 있으면, 갑자기 수유 콜이 온다. 지금 슬아가 깼으니 오셔서 젖을 물리겠냐는 전화다. 조리원에서 최대한 아기와 시간을 보내야 집에 가서 힘들지 않을 거란 생각에 수유 콜마다 열심히 수유실로 나갔다. 그때마다 나의 유축 계획은 완전히 어그러지고 그 어떤 패턴도 잡히지 않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슬아와 집으로 돌아온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조리원에서부터 시작된 혼합수유는 나의 하루를 예측할 수 없는 나날로 만들었다. 직접 젖을 물리는 직수, 젖은 찼는데 아기에게 먹일 수 없을 때는 유축, 그 유축한 모유를 데워서 먹이는 유축 수유, 유축한 모유도 없고, 가슴에 젖은 덜 찼지만 아기가 배고파할 때는 분유 수유까지. 모든 수유 방식을 경험했다. 나 조차도 혼란스러운 수유의 폭풍 속에서 나와 슬아 사이에는 수유 텀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그저 젖만 주다 끝나는 하루는 나에게 큰 허무함을 주었다. 매일 어플로 아기의 하루 일과를 기록하는데, 다음 스케줄이 전혀 예측이 안 됐다. 나 같은 계획형 인간에게는 나의 계획이 하나도 들어맞지 않는 이 하루하루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기분을 들게 했다. 계획이 안 된 하루는 잘못된 것, 매일 실패한 하루였다.
그러다 최근 계획 세우는 방식을 바꿔보았다. 수유를 언제 하고 몇 번하겠다는 계획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계획, 이를 테면 아침에 두유와 바나나 하나씩 먹기 같은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슬아에게 동요 10개 이상 불러주기. 하루에 한 번 세 줄짜리 일기 쓰기. 전자책 한 장이라도 읽기. 시간이 좀 난다면 비즈 공예 하기. 슬아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아주 쉽게 이뤄낼 수 있는 To do list를 작성해 아주 쉽게 하루 계획을 성취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다 적응이 되면 해야 할 일과 난도를 하나씩 늘려보는 것이다. 굳이 쓰지 않았어도 했을 일을 굳이 기록하고 체크해본다. 그리고 내가 내게 오늘 이만큼이나 해내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내가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지 나와 슬아의 하루 안에 작은 공식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슬아에게 아침 인사를 하고, 능숙해진 손놀림으로 기저귀를 갈고, 골고루 양쪽 젖을 물리는 일. 슬아의 옷을 빨아 널고, 분유 포트에 물을 올려두는 일. 슬아에게 동요를 불러주고,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인형인 척 말을 걸고, 자꾸만 빠지는 쪽쪽이를 입에 넣어주는 일. 슬아가 잠들 때까지 안아서 쓰다듬고, 자다가 걷어찬 이불을 덮어주고, 흐르는 침을 바로바로 닦아주는 일.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라도 나는 하루 온종일 슬아에게 눈을 맞추고, 슬아의 안전하고 행복한 하루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사회생활을 열정적으로 한 엄마는, 육아휴직 기간이 더 힘들다고들 한다. 집에서만 지내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결국 관점의 차이다. 아기와의 하루가 화장실 갈 틈 없이 바쁜 것은, 의미 없는 울음으로 나의 하루가 점철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모든 순간을 오롯이 아기에게 집중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다. 덧없는 시간이 아니다. 더없이 행복하고 의미 있는 하루들이 나와 슬아의 삶을 채워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