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이 된 우리 아기는 이제 물건을 잡고 일어서는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버티고 서있는 힘이 부족한지 비틀비틀거리다 넘어지곤 한다. 유독 엄살이 심한 아이들이 있다는데 다행히 우리 아기는 넘어져도 크게 울지 않는다.
본래 기질도 있겠지만, 육아 선배인 언니가 전수해준 '넘어져도 울지 않는 아기로 키우는 비법'이 있기 때문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아기가 넘어질 때 리액션을 크게 하지 않는 것. 보통 아기가 넘어지거나, 큰 소리가 나면 자신도 모르게 '어이구'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엄마 아빠가 놀란 티를 내며 큰 소리를 내면 아기도 덩달아 놀라 큰 소리를 내게 된다. 걱정이 많은 나 역시 아기가 '쿵야' 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하지만, 넘어져도 울지 않는 아기로 키우기 위해 소리를 애써 참는다. 놀란 마음은 가슴속에 꾹 숨겨놓고 짐짓 태연한 척, '어~ 넘어졌구나, 괜찮지?'라고 말을 건넨다. 아기도 처음엔 넘어져서 놀라다가, 내가 괜찮냐고 하면 괜찮은가 보다 하고 바로 다른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물론 이 방법은 돌 이전 아주 어린 아기들에게만 해당된다. 이 방법을 적용한, 두 돌이 갓 지난 우리 조카는 가끔은 엄살을 부리지만 크게 떼를 쓰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생각해 보면, 말을 할 수 없는 아기에게 우는 행위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자신의 느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웃거나 울거나 소리를 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어른에게 있어서 우는 행위와 아기들에게 우는 행위는 의미가 다르다. 아기들에게 우는 행위는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인 것이다. 그렇기에 '울지 않는 아기'로 키우는 것이 자칫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아기'를 키우는 것으로 변질될 수 있다.
아기들에게 주변 사람, 즉 부모의 리액션은 절대적이다. 아침에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난 아기에게 웃으며 잘 잤냐고 묻자, 우리 아기는 내 얼굴을 닮은 미소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렇듯 아기는 웃는 법, 인사하는 법, 화내는 법 모든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부모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행동의 옳고 그름 역시 부모의 리액션으로부터 배우게 된다. 초기 이유식 때 아무리 숟가락을 들이밀어도 입을 벌리지 않던 아기는, 중기 이유식에 들어서 밥을 잘 먹을 때마다 기뻐하는 내 얼굴을 보며 '밥을 잘 먹는 것이 옳은 일'임을 알고 주는 족족 잘 받아먹는 아이로 자라났다. 그렇기에 아기에게 어떤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지 울어야 하는 상황인지 아니면 의연하게 넘어가도 되는 일인지에 대한 판단도 부모를 통해 배우게 될 터다.
아기를 키우면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많다. 넘어져도 크게 울지 않는 딸아이를 보며, 나는 나의 감정을 스스로 판단하여 때로는 의연하게, 때로는 적절한 감정을 표현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의연한 척하며 내 감정을 무시할 때가 많았다.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다가 누군가 '너 당장 병원 가야 해'라고 말하면 그제야 꾸역꾸역 병원에 가는. '이 정도는 남들도 다 아프지 않나?' 생각하면서 내가 느끼는 아픔이, 감정이 '유난'이라고 묻어버리는. 울어야 할 때에도 울지 않는, 지나치게 조용한 어른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나의 이런 모습을 아기가 닮아버린다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아기'가 되어버린다면. 새삼스럽게 아기에게 가장 절대적인 존재는 나였음을 깨닫는다.
조카가 최근, 두 단어를 이어 붙여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조카의 첫 문장은 '배 아파'였다. 언니는 그런 조카를 보며 '아프지만 억지로 힘을 내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다음에도 또 어디가 아플 예정임을 알고, 우리는 모두 어딘가 아픈 채로 살고 있음을 아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 아기가 '넘어질 때마다 큰 소리로 울지는 않지만 내가 지금 어디가 아픈지를 알고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아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나의 아픔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다음에도 또 아플 수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가끔은 시끄럽고 가끔은 자신의 상처에 유난을 떨어도, 왜 우느냐고 타박하지 않는 엄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