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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Jun 24. 2021

아기와 함께 방바닥을 기어 다닌 이유

9개월이 된 우리 아기는 온 집안을 엄청난 속도로 기어 다니고 있다. 아기가 본격적으로 기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기와 둘이 집에 있으면 가끔 나도 옆에서 같이 기어 다닌다.


계기는 이러하다. 출산 한 달 즈음, 신생아 돌보기에 정신이 없던 초보 엄마 시절.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서울 아기 건강 첫걸음 사업'의 일환으로 간호사가 집에 방문해 올바른 양육방법과 수유 관련 지도를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딱 한 번 오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 앞으로 궁금해질 예정인 것들을 이것저것 물었다. 하지만 아기를 한 달 키워본 엄마의 질문은 지극히 근미래에 한정되어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신생아 시기 이후, 기어 다니고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게 될 때의 유의사항까지 친절히 읊어주셨다. 그때 해주신 무수한 말씀 중 딱 하나가 마음에 꽂혔다.


아기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
엄마 아빠도 같이 기어 다녀야 해요.



 아기가 움직임의 자유를 얻게 되면 엄마 아빠는 자유를 잃게 된다는, 비유적인 말인 줄 알고 하하 웃었는데 간호사 선생님의 얼굴은 사뭇 비장했다. "어른들 눈에는 절대 안 보이는 위험요소들이 정말 많아요. 꼭 기어보셔야 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아기가 기어 다니기 전엔 아기 혼자 사고칠 일이 거의 없는 듯하다. 움직여봤자 제 자리에서 꼬물대는 것뿐이라 숨 잘 쉬고 있는지만 확인해도 되는 것이다.(무수한 생리적 욕구 해결은 기본) 배밀이 시기를 지나 움직이기 시작하면 갑자기 힘을 잃어 턱을 꿍 찧을 수도 있고, 만지면 안 될 것, 열면 안 될 것, 들어가면 안 될 곳 가리지 않고 다가갈 수도 있다. 그야말로 매 순간이 사고 위험 지점이다.




기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위험 요소들도 많다. 가장 먼저 콘센트. 항상 침으로 범벅되어 있는 아기의 손이 콘센트를 만질 경우 위험할 수 있어서 콘센 커버는 아기 있는 집의 필수템이다. 또 다른 필수템으로 서랍 잠금장치가 있다.


평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거실과 부엌 식탁에도 많은 위험 요소들이 있다. 나는 거실에 테이블을 두어 위에는 읽고 있던 책을, 아래에는 기저귀와 잡동사니들을 넣어두었다. 모서리에는 일찌감치 모서리 보호대를 붙여놓았는데 놓친 부분이 있었다. 꼭짓점뿐 아니라 테두리 부분도 위험 요소다. 나조차도 테이블 아래 물건을 꺼내다 머리를 찧은 적이 간혹 있는데 아기는 오죽할까. 아기는 틈만 나면 책상을 잡고 일어서려 하거나,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 숨겨진 세상을 탐험하려 했다. 내가 머리를 찧은 날, 나는 바로 테이블에 부착할 수 있는 충격방지 쿠션 범퍼를 구입했다.


부엌에서는 식탁 아래도 위험하지만 앉아있을 때도 조심해야 한다. 아기 의자에 아기를 앉혀두면 신이 나서 다리를 빵빵 차는데, 그럴 때마다 식탁 다리에 발이 부딪힌다. 그래서 테이블 용으로 구입한 범퍼를 식탁에도 열심히 붙였다.


의외로 위험한 것이 발매트. 무엇이든 입에 넣고 보는 구강기의 아기에게 발매트는 훌륭한 먹잇감이다. 거실에 깔려 있는 도톰한 매트와는 달리 부엌의 발매트는 얇으면서도 보드라워서 바닥을 기어 다니는 입장에선 관심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발매트와 함께 실내화도 주시해야 한다. 특히 내 실내화는 청소 기능을 겸비한 극세사 청소 슬리퍼라 매력도가 더 올라간다. 잠시라도 실내화를 벗어두면 무서운 속도로 다가와 손에 쥐고 빨려고 한다. 그래서 항상 실내화는 아기가 보지 못하는 곳에 숨겨둔다.


너무나 매혹적인 자태


무릎으로 앉을 수 있게 되면 위험해지는 것이 바로, 부엌 서랍과 오븐. 우리 집은 아직 아기가 부엌 서랍은 침범하지 않아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진 않았다. 나는 굳이 잠금장치를 부착하지 않고 위험한 물건들을 빼둘 예정이다. 엄마 아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열고 닫는 것을 아기만 못하게 하면 억울할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내가 기어보니 오븐은 도저히 열지 않고서는 못 기겠더라)


바닥을 기어 다니며 발견한 또 하나. 빨래 건조대나 의자가 바닥과 맞닿아 있는 바퀴. 아기들을 바퀴를 참 좋아한다. 바퀴가 있으면 돌려봐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인간의 본능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건조대나 의자를 바꾸기엔 불편함이 너무 커지니 바퀴가 달린 물건을 한 방에 몰아넣었다. 그 방에 가급적 들어가지 않게 하거나, 들어가 있을 땐 항상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제는 아기가 집 안에서 안 가는 곳이 없다. 빠른 속도로 모든 방을 돌아다닌다. 아기의 행동반경이 넓어졌다는 것은 집안의 모든 공간을 안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안방 구석에는 각종 청소도구가 진열되어 있는데 '설마 여기까지 아기가 오겠어?'라고 생각한 곳까지 아기는 손쉽게 침투했다. 우리는 나름 숨긴다고 숨겨놓은 것을 아기는 아주 쉽게 발견하고 접근한다. 잠시 눈을 뗀 사이 바스락 덜거덕 소리가 나서 쫓아가 보니 청소기 머리를 잡고 흔들다가, 옆에 있던 페브리즈 통을 흔들고 있었다. 바닥에 붙어 있으면 온통 만지고 싶은 것들 투성이다.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공간이 지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에 손만 닿을 수 있다면 어디든 기어가는 것이다.


아기와 함께 집안 곳곳을 기어 다녀 보니 바닥에 있는 모든 것이 흥미롭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아기는 훨씬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빠른 속도로 온 집안을 탐험한다. 서있을 때, 앉아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아기의 시선에서 기어보았을 때 비로소 보인다. 으레 '이것 이것이 위험하겠지' 생각만으로는 찾을 수 없던 것들. 그 시선으로 바라봐야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최근 수강한 육아 강의에서 인상 깊은 문장이 있었다. '장난감이 재밌는 것이 아니라, 재밌는 것이 장난감이다.' 아기에겐 세상의 모든 흥미로운 것이 장난감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기와 함께 하는 우리 집은 아기의 장난감을 빼앗지는 않되, 안전을 우선시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다. 오늘도 쑤신 무릎을 꿇고 아기와 기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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