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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Sep 24. 2021

둘째를 갖는 용기

언니가 둘째를 임신했다.

추석 연휴에 만나 같이 밥을 먹다가 건배를 하자고 하니, 언니가 갑자기 가족들을 불러 모았다. 첫째 딸에게 "엄마 뱃속에 뭐가 있지?" 물으니 조카는 "아기"라고 작게 답했다.

언니는 임신 9주 차라고 했고, 나는 그 사이 언니를 두 번이나 만났다. 언니와 대화하면서 내가 몇 번이나 농담으로 '언니 임신한 거 아니야?'라고 물었고 언니는 발연기를 하며 말을 돌렸다는데, 난 그 대화조차 기억에 없다. 언니가 임신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언니의 임신을 생각지도 못했던 이유는, 언니가 첫째를 임신하고 키워내는 과정이 결코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째 임신은 계획한 것이 아니었고 그다지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집안의 첫 손주 소식에 가족들 모두 기뻐했지만, 언니의 재계약 걱정이 그 뒤를 이었다. 임신 중에는 폐부종 때문에 아픈 날이 많았고, 형부마저 언니를 속상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형부가 아픈 언니를 혼자 두고 본가에 갔을 때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언니 집에 조르르 갔었는데 언니는 힘든 티도, 아픈 티도 내지 않았다. 내가 없을 때 혼자 방에서 울면서 그렇게 임신 기간을 '버텼다'.


내 딸과 언니 딸


출산 과정도 쉽지 않았다. 자연분만을 하려 했지만 41주가 되도록 소식이 오지 않았고 결국 유도분만을 하게 됐다. 내 주변에 유도분만을 성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유도분만을 시도하자 뱃속의 아기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 중단하고, 다음 날 다시 시도를 해야 했다. 결과는 마찬가지. 결국 제왕절개로 아기를 낳았다. 병원 사정 상 6인실에 입원하게 되어 첫 3일 간호를 내가 맡았다. 수술 직후에도 크게 아파하지 않아서 나는 제왕절개가 별 거 아니구나 생각했고 내가 그 수술을 하고 나서야, 동생 앞에서 아픈 티를 내지 않았던 언니의 마음을 생각하게 됐다.


언니는 육아휴직을 쓰지 않고 출산휴가 3개월만 썼다. 아직 몸 상태가 돌아오지도 않았을 때 다시 출근해 재계약을 하고, 퇴근하고 나면 육아 출근을 했다. 몇 개월 뒤엔 어린이집을 보내게 되어 하원까지 도맡았다. 그 사이 언니의 몸과 마음은 쉴 틈이 없었다. 점점 자라나는 아이를 보며 언니는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고, 아기의 행동과 말에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면서 힘들어했다. 맞벌이 부모님과 살면서 겪었던 첫째로서의 외로움과 트라우마. 같은 환경에서 자라온 내 시점에는 '너무 안 좋았던 기억을 확대해서 보는 건 아닐까' 싶어 걱정스러울 정도로, 언니는 힘들었던 기억을 끄집어내어 다시 상처 받고 있었다.


얼마 뒤 언니는 스스로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극복했다. 언니는 내가 걱정한 것보다 많이 아팠고, 많이 힘들었지만 생각한 것보다 강인했고, 영리했다. 상처는 제대로 직면할수록 말끔히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국 언니는 상처가 아물었고, 건강하고, 강인하다.


앞조카 뒤딸


그럼에도 언니를 마냥 나약하게 봤던 동생은, 언니가 그 힘든 과정을 다시 시작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둘째를 가질까 얘기를 할 적에도 으레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첫째 아기는 이제 30개월 차가 되어 애교도 많고, 말도 통하고, 다른 아기와 놀아주기도 한다. 육아가 한결 편해지기도 했으니 둘째를 가지기에 이보다 좋은 타이밍은 없다.


임신, 출산, 육아가 두려운 가장 큰 이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고 돌발상황들이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미 한 번 해봤고 다양한 돌발상황들을 경험하면서 '당황스러운 순간에 덜 당황하는 법'을 익힌 경력직 엄마이기에 언니도 주변 가족들도 두려움이 덜 할 것이다. 그럼에도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이를 길러내는 일이지만. 2년 전보다 강해진 언니를 알기에 둘째를 가진 언니의 용기가 더 놀랍고 경이롭다. 둘째 아기를 길러내며 무수한 아픔과 상처를 다시 대면하고 우는 날도 여전히 많겠지만, 그 과정 끝에 다시 웃게 될 것을 알기에 둘째 조카와의 만남이 더욱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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