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시작은 남편이었다. 열흘간 친정살이 중인 나와 딸을 데리러 새벽부터 일어나, 꽤 오랜 시간 걸려 달려온 남편. 남편에게 미안하게도 남편 없는 열흘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 역시 그러했는지 얼굴이 좋아 보인다. 아이는 특별히 아빠를 반기지 않았는데 푹신한 아빠 품에 안기자 편안한 미소를 보였다.
먼 길 달려온 남편을 위해 시간 맞춰 준비한 브런치를 다 같이 야무지게 먹고, 아이들과 함께 가족 낮잠 타임을 가졌다. 요즈음 쉽게 낮잠을 자지 않았던 아이가 평화롭게 잠들어주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피곤했던 가족들 모두 순서대로 잠이 들었다.
조카가 일어나자 한 명 씩 연이어 기상했다. 오늘은 아빠의 임장을 함께 가기로 한 날. 다들 조용하지만 분주하게 외출 준비를 마쳤다. 아빠는 단독주택에 대한 로망이 있다. 땅을 사서 2층 집을 짓고,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줄 예정이다. 여유가 된다면 내 인형 수집품을 전시하는 카페도 만들 것이라는 게 아빠의 계획이다.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다 보니 어느덧 근처에 도착했다. 더 이상 차가 진입할 수 없을 정도로 시골 마을 끝자락. 아이들과 손을 잡고 할아버지의 땅이 될 곳을 찾아 걸어 다녔다. 목적지까지 제법 거리가 되었는데 아이들은 길가에 핀 꽃을 구경하고, 엄마는 네잎클로버를 열심히 찾았다. 정작 땅은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전세낸 듯 조용한 시골 마을을 거닐던 그 시간이 참 평화로웠다.
두 번째 코스는 길가에 있던 공원이었다. 큰 기대 없이 왔는데 의외로 큰 규모의 놀이터가 있어서 나도 아이들도 한껏 흥이 올랐다. 우리 아이는 양갈래 한쪽이 풀릴 정도로 신나게 몸을 흔들었고, 조카도 여러 놀이기구를 바쁘게 오갔다. 놀이기구 옆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여럿 서있다. 이른 아침 내리던 비가 그치고 맑은 하늘에 커다란 구름들이 흐르고 있었다. 밝게 웃는 아이의 사진을 찍으며 놀다가, 잔디에 앉은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땅 사고 집 짓고 그런 게 행복이 아냐. 이런 게 행복이야.
아이들이 지칠 때까지 뛰어놀다가 식당으로 향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브레이크 타임이 있었는데, 정확히 브레이크 타임 끝난 시간에 도착했다. 평소 밥을 많이 먹는 아이들은 아닌데 몸을 쓰며 놀았던 탓인지 숟가락을 놓지 않는다. 평소 맛집으로 유명한 식당인데 주말 저녁인데도 손님이 우리뿐이었다. 배가 불러 기분이 좋아진 조카와 함께, 조카가 좋아하는 노래를 메들리로 불렀다. 우리 아이는 양 볼에 밥풀을 가득 붙이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식당 앞에 핀 코스모스를 바라보았다. 조카가 가장 좋아하는 '모두 다 꽃이야' 노래를 부르고, 꽃을 배경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가족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해맑았다.
집에서 나온 지 4시간이 지났지만 우리의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 근처에 있던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바다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온 곳인데, 남편은 어딘가 지쳐 보인다. 아랑곳않고 아이와 백사장을 밟았다. 백사장 위에는 커다란 그네가 있었다. 맑은 하늘과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그네를 탔다. 일말의 스트레스도, 걱정도 없는 맑은 기분이다. 아이는 바닷물이 무서워 앙 울기도 했지만 이내 아빠 품에서 평안을 찾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아이들이 깊게 잠들었다. 우리 아기는 그렇게 잠들어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집에 돌아와 오늘 찍은 사진을 돌려보며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후식으로 아껴두었던 한우와 와인을 꺼냈다. 한 입 씩 맛만 보자던 후식은 늦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아이를 낳고 나서 한 번쯤은 가족들과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시고 싶었는데 그게 어제였다. 열흘 동안 있었던 크고 작은 일을 함께 회상했다.
걱정되는 일도 있고, 후회되는 일도 있고,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들도 있었다. 아빠는 공원에서 내가 했던 말이 인상 깊었는지 몇 번이나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들보다 돈이 많지 않아도, 내게 대단한 명예가 있지 않아도 나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신의 행복은 자녀들의 성취로 채워지고, 또 그 손녀들의 웃음으로 완성된다고.
항상 집에 술이 마르지 않는데 하필이면 흥이 한껏 올랐을 때 술이 똑 떨어졌다. 새벽 3시, 다 같이 옷을 주워 입고 집 앞 편의점으로 향했다. 아빠는 편의점에서 가장 비싼 술을 고르고 안주도 넉넉히 사라며 자신이 좋아하는 맛동산 과자를 담았다. 모두 얼큰하게 취해 아빠 손을 꼬옥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장바구니도 없이 나와 각자 술 한 병 씩 품에 꼬옥 안고. 그렇게 1시간을 더 떠들다가 만취 상태로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밤새 누군가 날 두들겨 패기라도 한 듯 몸이 쑤시다. 잠도 술도 덜 깬 내 몸 위로 우리 아기와 조카의 몸이 포개어진다. 따뜻한 묵직함이 내 행복을 채운다. 아낌없이 행복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