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익선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램프코어에 설치된 백남준의 비디오 타워 작품명도 「다다익선」이다. 참새방앗간처럼 늘 다시 가고 싶던 미술관에서 혼자, 친구와, 아이와 함께 봤던 브라운관 모니터는 컸고 많았고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많을수록 더 좋은 것이 아끼는 책이 된다면, 바로 그 특별한 작품이 시간을 초월해 반복해서 등장한다면 더없이 기쁠 것이다. 『어린 왕자』, 『빨간 머리 앤』등 책이라는 한계를 넘어 하나의 문화 상품, 일종의 현상을 일구는 경우가 일상적이다. 우리는 기꺼이 처음 만났던 순간을, 추억을, 소중함을 다시 곁에 두고 싶어 한다. 내게 주는 선물로써 아니면 어떤 이름을 붙이거나 상관없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른이 된 후 읽었다. 앨리스를 좋아하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에 더 붙들려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사랑해서 도서관 친구들에게도 4차시 한 세트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깊이 읽기(슬로 리딩)를 반복하며 너희는 앨리스를 알아야 한다 강요한다. 일곱 권의 각각 다른 앨리스를 읽고 만지고 돌리고(회전목마 팝업북) 별점과 한 줄 평, 추천서 쓰기, 앨리스 따라가기 등 네 번의 만남은 빠르게 지나간다. 패러디나 오마주, 변용과 재해석, 헌사는 원작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모두 소중하게 남는다.
그때 그 서평>
① [서평]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상·하)』열린책들/이미선옮김
- 올곧고 아름다운 그녀, 제인 에어 (20210308)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Jane Eyre(열린책들/이미선 옮김/1847)』 는 21세기의 현재까지 영화로, 연극으로, 낭독 뮤지컬로 독자 곁에서 여러 옷을 갈아입으며 함께하고 있다. 완역 번역본도 여러 선택지가 있지만 스핀 오프작으로 제인 에어는 이제 그만, 버사 메이슨의 눈과 입으로 이야기하는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부터 제인 에어를 주요 모티브 삼아 확장하며 생각거리를 던지는 패러디 작품, 어른도 아이도 기뻐할 만큼 사랑스럽게 각색되어 나온 근래의 일러스트 판형까지 그녀는 독자의 시선에서 빗겨 사라지지 않는다.
1847년은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자매가 각각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출간했다는 점에서 의미 깊은 해 이기도 하다. 역자 해설의 다음 문장은 작품의 특징을 잘 설명한다. 인기를 누리며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제인 에어』는 연애 소설, 고딕 소설, 종교적인 주제를 다룬 소설로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위선에 대한 비판을 포함한 사회 비판서이자 주인공 제인 에어의 정신적, 정서적 성장을 다룬 교양 소설 혹은 성장 소설로도 익힐 수 있다.(753p)” 더불어 정신분석학적인 텍스트, 버사 메이슨을 제인 에어의 거울 이미지로 해석해 볼 수 있는 페미니즘 소설, 인종적 편견을 보여주는 사회 문화적인 텍스트(754p)로도 접근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완역으로는 각각 다른 출판사의 판형으로 두 번째 읽는 “제인 에어”는 우선 ‘독서의 즐거움이란 이런 것’을 직접 경험케 해주는 작품이다. 한순간도 언제 다 읽나, 언제 끝나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고 책 속으로, 제인 에어의 공간과 주변의 인물들과 심지어 꽃과 나무, 바람까지 촉감되는 가상공간으로의 초대를 내내 즐겼다. 제인 에어가 살아온 시간의 궤적을 일 방향으로 쫓을 수 있는데 시기별 장소가 또 하나의 구조물로써 안정감을 준다. 게이츠헤드에서 로우드까지의 어린 시절, 손필드에서 로체스터와의 만남, 윗크로스의 무어하우스에서 과거를 절연한 시간, 다시 손필드로, 그리고 완벽한 결말로 마무리된다.
“제인 에어”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때로 ‘독자여’하고 직접적으로 말을 건네기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제인 에어의 고난 앞에서는 응원하고, 부당함을 겪을 때면 함께 분노하고, 위험 앞에서는 숨죽이며 마음 졸이곤 했다. 부당함은 여러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가장 압도적인 것은 ‘붉은 방’의 감금이다. ‘음산한 신성화의 느낌’을 간직한, 진한 붉은 다마스크 커튼과 붉은 양탄자, 탁자를 덮는 선홍색 천 덮개, 썰렁하고 조용하고 엄숙한, 외삼촌이 죽은 이후로 아무도 기거하지 않았던 방에 두려움에 떨며 홀로 갇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결코 지워지기 어려운 트라우마다. “그런데 제인 에어, 너는 착한 아이니?(49p)”라는 질문과 “착한 아이가 되길 바란다.(67p)”는 판단하는 눈길도 그렇다. 자신의 의지 너머에 있던 버사 메이슨의 존재나 후에 세인트 존의 강압적 청혼도 결코 쉬운 장애물만은 아니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제인 에어는 자신의 조건과 사회적 편견에 의기소침하지 않고 분별 있는 목소리를 낸다. 자신을 존귀히 대하면서도 엄격하고, 스스로에게 물을 때에도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질서! 우는 소리 하지 말기! 감상에 빠지지 말기! 미련 갖지 말기! 나는 이성과 결단만 허용할 것이다.(262p)” 이성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성향, 동시에 타협하지 않는 강직함은 가장 매력적인 그녀의 특징이다. 또한 자신의 감정을 분명하고 세밀하게, 상대가 충분히 공감하게끔 풀어서 그려 보이는 점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대화를 통해 제인 에어는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성실히 밝히는데 그들의 대화를 곁에서 듣는 즐거움, 말들을 왜 이렇게 잘하나 생각할 때 다시 한번 작가의 필력에 감탄했다. 비유와 상징, 묘사와 인용, 반복적이고 리드미컬한 단어의 조화, 재치가 넘치고 유머가 웃게 만드는 순간들까지 가득하다. “단지 저보다 나이가 많다거나 세상 경험이 더 많다는 점 때문에 제게 명령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저보다 더 뛰어나다는 주장은 당신이 어떻게 시간과 경험을 이용했느냐에 달려 있어요.(216p)”
한때 입장동화가 강조되었듯이 다른 등장인물의 편에서 상황을 바라본다면 다른 생각들이 따라온다. “항상 그 애 엄마가 싫었어.(374p)”로 시작되는 리드 외숙모의 마지막 말들은 결국 그 속에 함몰되어 자신뿐 아니라 가족 모두를 잃어간 그녀의 부정적인 감정의 강도를 확인케 한다. “진실하고 너그러운 감정을 그리 대단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들 두 성격은 그런 감정이 없기 때문에 한 사람은 참을 수 없이 혹독하고 다른 한 사람은 멸시받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성격이 되었다. 판단력 없는 감정은 사실 물로 탄 약 같고 감정으로 순화되지 않은 판단력은 너무 쓰고 까칠까칠해서 도저히 삼킬 수 없는 조각 같다. (382p)”
“지배하고 정복할 권리와 살아서 봉기하여 마침내 군림할 권리, 그렇다, 그러니까 말할 권리를 주장했다.(408p)”, “저는 지금 관습이나 전통의 매개를 통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의 매개를 통해서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의 영혼에 말을 거는 것은 바로 제 영혼이에요.(410p)” 그러나 제인 에어는 그저 돌기둥인 윗크로스, 벌판, 히스 속을 헤매며 무모할 만큼 극한의 상황에 스스로 처한다. 처음 읽었던 때 적나라한 고통이 너무도 현실적이라 놀라왔으며 시간이 지나 또 다른 변곡점에 이를 순간 제인이 로체스터의 목소리를 듣는 장면은 제일 인상 깊었다. 천성의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잘 맞는(733p) 영혼의 단짝이 어려움을 이기고 결실을 맺는 이야기는 그렇게 마무리된다. 결혼 후 10년이 된 시점에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며 정리한 제인 에어의 수기는 앞으로도 계속 현명하고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리라 넉넉히 짐작케 한다. 제인 에어의 많고 많은 말 중 하나를 새로운 모토로 삼는다. “할 일은 아무리 이른 시간에 시작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아.(523p)” 읽을 때마다 더 좋아지는 작품들이 있어 감사하다.
책 속에서>
-무엇보다 가장 좋아했던 것은 절대 끝나지 않는 이야기에 마음의 귀를 여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서술되고, 내가 바라지만 내 실제 삶에는 없는 온갖 사건과 생명력, 열정, 감정으로 고무된 이야기였다.(176p)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해.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친구가 없으면 없을수록, 오점이 없으면 없을수록 나는 나 자신을 더욱더 사랑해. 나는 하느님이 주시고 인간이 인정한 법을 지킬 거야.(중략) 법과 원칙은 유혹이 없는 때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야. 그것들은 몸과 영혼이 그 준엄함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킨 지금과 같은 그런 때를 위해 존재하는 거야. 그것들은 준엄해. 그것들은 절대 더럽혀져서는 안 돼. 내가 개인적인 편의를 위해 법과 원칙을 어긴다면 그것들의 가치가 어떻게 되겠어? 그것들은 가치가 있어. 나는 항상 그렇게 믿어 왔어. (519p)
② [서평] 구예주의 『제인 에어』21세기북스/샬럿 브론테 원작/서유라 옮김
- 또 하나의 근사한 제인 에어 선택지 (20210214)
구예주의 『제인 에어(21세기북스/샬럿 브론테 원작)』는 샬럿 브론테가 1847년 커러 벨이라는 남성 필명으로 발표한 고전 명작을 일러스트 에디션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책은 물론 영화와 연극 등으로도 다양한 옷을 입고 지속적으로 대중에게 다가오는 이유는 제인 에어의 용기 있고 생생한 성장 이야기가 매번 감동을 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출판 당시의 원제목이 Jane Eyre: An Autobiography 엿듯이 자전적 색채는 독자의 몰입감을 높인다. 어린 왕자나 빨간 머리 앤이 콜렉터에게 설렘을 주듯이 제인 에어 또한 내게는 ‘모두 다 소장하리’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 제루샤 애벗이 읽는 소설 중 하나이며, 가까이는 “제인 에어와 여우 그리고 나”의 주인공 헬레네의 친구가 되어주는 책 ‘제인 에어’는 그렇게 빛바래지 않는 현재의 동행자이기도 하다.
고전 명작을 만나는 최선의 방법은 완역 읽기가 정답이지만 그에 앞서 또는 그 이후에 또 다른 버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다. 구예주는 “일러스트 에디션 제인 에어”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프롤로그에 설명하는데 기쁘고 보람되었을 애쓰는 순간들 자체가 그려지기도 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등장인물과 제인의 공간을 일러스트와 요약글로 보여주는데 이런 부분이 무척 매력적이다.
작가의 마음을 두드린 장면들은 일곱 장으로 담아냈는데 원작이 총 38장 700여 쪽 이상의 분량임을 감안할 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과도한 축약이 원전에 대한 편향된 관점을 제시할 수 있고 사라진 장면들에 대한 아쉬움을 남길 수 있지만 일러스트 에디션은 가능한 분량 내에서 균형 있게 흔적을 남겼다고 생각한다. 붉은 방의 상징성, 기숙학교에서의 고통과 우정, 로체스터를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까지의 과정 중 버사 메이슨으로 인한 긴장감이나 위트크로스에서의 고난도 엿보게 된다. 가장 인상 깊었던 로체스터의 부름에 제인이 반응하는 부분도 오래 전의 감동을 상기시킨다. 행간을 통해 꿈꿨던 장면들이 아름다운 색조와 풍부한 표정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니 이 책을 아끼지 않을 수 없다. 제인 에어 재독을 위해 시간을 들여 찾아보려 한다.
서평 8년 차 시점>
『제인 에어』도 성인이 된 후 읽었다. 완역으로는 출판사를 달리해 재독 했고 첫 번째 완독 서평은 쓰지 못해서 아쉽다. 구예주의 일러스트 에디션이 추가됐는데 그 이전에 패니 브리트와 이사벨 아르세노가 글과 그림을 작업한 『제인 에어와 여우 그리고 나』가 있다. 『제인 에어와 여우 그리고 나』는 진지하고도 멋진 울림을 주는데 적나라하면서도 사실적 표현은 고통에 직면한 끝에 다다르는 성찰과 성장의 카타르시스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필선이 드러나는 이 흐릿한 그림체에까지 매료되어 이사벨 아르세노 작품들이 새롭게 도서 목록에 올랐으며 『거미 엄마, 마망-루이스 부르주아』로 다시 친구들을 만났다. 올봄 도서관에서 진행했던 성인 독서미술치료 수업에서 완역의 문장으로. 재해석 본의 시선과 물성으로, 기어코 성장하고야 마는 헬레네의 서사로, 조금씩 다른 톤으로 다가오는 영화로 충만했고 함께했던 분들은 열두 번의 만남 중 가장 만족스러운 차시로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