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 지고 지금까지 온 물건이 언젠가부터 불편하다. 올해 초에 이사하면서 결혼 후 처음으로 물건을 정리하고 버렸다. 24년 만이다. 평수를 줄여 와서 버릴 수밖에 없기도 했지만 이젠 빈 공간이 더 좋아졌다. 처분해야 해서 안타까운 물건도 있었다. 내가 만든 아들 방의 6인용 엘다 나무 탁자, 시댁에서 가져다 20년 기른 관음죽, 공작 날개가 섬세히 빛나던 미니 자개농 정도가 그랬다.
세 가지 모두 중고 장터에 내었더니 3초 안에 팔렸다. 나무 탁자는 5만 원에, 관음죽은 1만 원에, 미니 자개농은 엔틱 장터에서 샀을 때 가격보다 낮추어 내었다. 사실 모두 질이 좋고 고상했으며 깨끗한 것이었지만 욕심 없이 보내고 싶었다. 태순이가 탁자 다리를 갉은 데가 있어 싸게 드린다고 하니 강아지 자국이 정겨워서 받아보고 더 좋다는 거래 후기가 왔다. 이 정도 잘 생긴 관음죽 화분은 30만 원 이상 줘야 한다며 잘 키우겠다고 하거나 자개가 고운 엔틱을 만나서 행복하단 말도 들었다. 구매자가 하나같이 좋은 분들이어서 아쉬움을 덜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저 아이들은 눈에 삼삼하고 체취까지 느껴진다만 좋은 곳에서 잘 있을 터이니 염려하고 싶지 않다. 아끼고 정든 저들도 이럴진대 다른 것은 더하리라 생각하면 비우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만든 탁자와 20년 기른 관음죽. 잘 보내었다.
처분하고 나서 다시 장만한 것은 여지껏 스텐 숟가락 하나뿐이다. 수저도 얼마나 많던지 유기 수저 다섯 벌과 스텐 수저 한 벌만 남기고 집 근처 성당에 모두 드렸는데 자취하는 아들이 스텐 숟가락을 하나 더 달라고 한다. 유기는 관리가 어려워서 그러는 모양이라 하나 새로 사 주었다.
이제는 딱히 버려야 할 거창한 것은 많이 없지만 미련스럽게 끼고 있거나 무관심으로 방치된 소소한 것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한다. 며칠 전부터 '저 옛날 사전, 이젠 쳇 GPT가 번역이니 작문이니 다 도와주는데 무슨 소용인가' 싶더니 오늘 드디어 표지와 속지를 분리해서 버렸다. 'Power shift'도 언제 때 책인가. 대학원 공부할 때 열심이던 기억을 잊고 싶지 않아서 모셔둔 것들이겠지. 안 쓸 줄 알면서도 선물이라 욕심내 열어보고 팽개친 화장품도 버렸다. 필요한 사람 줄 걸. 삼분의 일도 못 쓰고 유통기한이 지나곤 하는 쿠션, 파우더, 파운데이션도 버렸다. 이젠 이런 화장품 살 일은 없다. 베이스만 얇게 바른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까모메 식당'에서 사치에가 '커피 루왁' 주문을 외면 맛있는 커피가 탄생했다. 고급스럽다는 사향고양이 똥 커피 '루왁'. 지인에게 이것을 받고 기뻐했건만 먹다가 고이 봉해 놓고 잊었다. 루왁은 사향고양이를 평생 철창에 가둔 결과란 걸 알게 된 지금은 줘도 먹고 싶지 않다. 그러고 보니 비싸게 산 보이차도 거의 그대로 뒹굴고 있을 텐데.
미련이든 무관심이든 끼고 있던 것을 보내는 쾌감
사실 사람들이 물건을 버리고 싶어 하는 이면에는 물리적인 청소 개념을 넘어서는 심층적 이유가 있다. 실천 여부나 정도를 떠나서 적어도 미니멀을 사색한 적이 있다면 말이다. 이 년 전 가을, 비움에 대한 글을 처음 썼을 때 우리 모두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이 비우고 싶은 첫째 이유였고 지금도 그렇다. 공수래공수거인 줄 알면서도 욕망 탓에 잊고 끌어모으며 살게 된다. 사람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요즘은 내가 감당할 만큼만 데려가려 물건을 비우고 싶다. 중년이 되어 예전과 다른 나를 만날 때 자주 쓸쓸해지곤 한다. 달라진 내가 감당되지 않아서 물건이라도 감당해 내고 싶어 지는지도 모른다. 오십이 으슥해 가니 낯선 내 모습도 익숙해져서겠지만 이젠 그런 나를 받아들이려고 한다. 필요 없는 물건을 정리하다 보면 중년의 무게도 좀 개운해지겠지. 나아가 필요한 물건이 점점 줄어드는 사람이 되면 나이 든 나도 멋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