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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은수 Jul 20. 2023

시인과 남편

내게 3월의 첫 번째 시인은 만해 한용운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3학년이 되면 '님의 침묵'을 배운다 듣고 너무 고3이 되고 싶었다. 여타 시들과 달리 줄글로 된 그 시의 묵직함은 뜻도 모르면서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침묵'이라는 말만으로도 훌륭한데 '님의 침묵'이라니. 존재의 부재를 '침묵'이라는 소릿값으로 표현한 것이 여고생의 심장을 울렸다.


여전히 추웠던 3월에 이 시를 배웠던 거 같다. 수업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회자정리 거자필반 會者定離 去者必反'이라는 어려운 한자 어구를 쓰시면서 초로의 국어 선생님은 담담히 이 시를 가르쳐 주셨다. 오랜만에 이 시를 읊어 본다.



님의 침묵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현대어 표기로 적음)



빨간펜이 두 군데다. '굳고'는 은연중에 놓친 것 같고,  저 멋진 문장,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앞의 감탄사는 왜 생각이 안 났을까?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은 아직 입에서 술술 나오긴 하는데 뒤에서 다시 반복되는 것이 새롭게 다가온다.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이 반복되나... 그런가? 하고 읊긴 했는데 맞았구나. 암송하던 시였건만 오랜만에 읊어보니...... .   하기야 문자란 문자는 모조리 생각지 않던 세월이 족히 2년은 되었었지.


어쨌든 이 시를 읊으면 3월의 추위 섞인 알싸한 봄이 사랑의 곡조와 함께 피부를 헤집고 들어온다.  '삶에선 사랑의 행복보다 오히려 실연이 더 풍요로운 어떤 것'이라는 역설적인 아스라함을 그때 처음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3월의 두 번째 시인은 윤동주다.  고1 때, 학기 초 문예반 모집 포스터에 그의 시 일부가 실렸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참회록' 중에서



아마 저 구절을 인용하며 '문예부로 오세요. 밤이면 밤마다 당신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지 않으시렵니까.'라는 류의 권유를 했을 테지.


중학교 때는 윤동주의 '서시', '별 헤는 밤' 정도를 알았던 거  같다. '서시'는 엄숙하여 경건하게 바로 앉아서 바라봐야 하는 시였다. '별 헤는 밤'은 푸랑시쓰 쨤, 라이넬 마리아 릴케 같은 이국적인 이름과 패, 경, 옥이라 나열되는 인물들에 대한 상상을 해 보면 얼굴 모르는 그들에게 근사한 동경이 들게 했다. '내 이름자 묻힌 언덕'이라니. 세상의 온갖 파토스는 자기 것이라는 듯 비애감을 즐기던 꼬마 여중생은 제게 어울리는 끝판왕 시구쯤으로 받아들였던 듯. 귀엽다. 근데 당시에는 윤동주의 모습을 알지 못했다. 시인의 얼굴을 보았다면 어떠했을까? 궁금하다.


여고에 진학하여 문예반 포스터에서 만났던 저 시구는 당장이라도 손바닥 발바닥으로 나의 거울을 닦아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게 했다. 아. 나는 왜 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시구를 몰랐을까. 열등감이 올라왔다. 그런데도 문예반에 들지 않았다. 당시 인기 절정이던 총각 선생님이 문예반을 지도하셨는데 괜스레 그런 모임쯤에 가서 문학한다고 폼 잡는 것이 싫었다. 문학은 멀리서 바라볼 때 더 감질나고 신비로웠다고나 할까. 실상은 문학보다 저 총각 선생님을 보고 문예반을 하려는 아이들이 더 많았고 그것이 내겐 유치해 보여서였던 거 같다. 그런 나는 정작 화학 선생님을 사모했다. 하하.




복직하고 3월도 중반을 넘던 어느 날. 그럼, 동주의 시간. 그래서 윤동주의 사진을 내 파티션에 붙여 놓고 매일 본다. 시인의 저 맑고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도 저런 눈동자를 가지게 된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고 앉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리고 참말 잘 생겼다. ㅜ


어느 날 동료가 와서는

"어? 윤동주네요! 저는 하은수 씨 남편분인 줄 알았어요. 대학 졸업 때 사진."

그러자 여기저기서

"응? 저 사진이 윤동주야? 나도 남편인 줄 알았는데...... ."

" 나도."


엉? 직장에서 내가, 남편 졸업 사진을 떡하니 자기 자리 앞에 붙여놓는 여자라는 생각을 다들 했단 말인가? 아찔하구나. 내게 말은 못 하고 하 참. 이분들, 그냥 보고 계셨던 거구나.


심히 궁금하다. 이들에게 난, 동안

로맨티시스트였을까, ㄸㄹㅇ 였을까.



파티션 안으로 남편을 붙여놓고 매일 보는 저 여자의 머리꼭지는 그들에게 무엇이었을까








병원


                                                         윤동주



살구나무 그늘로 얼골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어,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

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

찾아 오는 이, 나비 한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왔

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

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

한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안으로 사라진다. 나

그여자의 건강이 -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

를 바라며 그가 누었든 자리에 누어본다.



1940. 12

(원문 표기를 따르고 한자어는 한글로 수정하였음)





동주의 시는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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