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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길 2_ 출퇴근 랑데부

by 하은수

너무 일찍 왔다. 시간이 많다. 연못을 보면 지루하지 않다. 왜 두 마리가 만나려 하면 기필코 사랑의 랑데부라 생각할까.




'홍해의 갈림길'을 지나 건물 사이 좁은 길로 접어든다. 이 앙큼한 발자국의 주인공, 댕댕씨 얼굴이 늘 궁금하다. 그리고 이분의 흔적을 지워 없애지 않고 천연스럽게 화석으로 박아둔 마을 사람의 마음에 잠시 고개 기대고 간다.


어느 댕댕씨 화석. 저 골목 끝까지다. ㅎㅎ



왕복 2차선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뒤돌아 보면 쌍화차나 십전대보탕을 내오는 게 틀림없을 '다방'이 셔터 올릴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레트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그야말로 다방'. 한때 시골 다방 레지가 되고 싶었던 나였는데...... . 난 저 밀대 걸레로 다방 바닥을 빡빡 문질러 댔을 터인데. 그러면 손님이 한 분이라도 더 오신다는 듯이.




'시골 다방 레지가 되고 싶은 나'가 나오는 글.





파란 불도 참 빨리 돌아온다. 차보다 사람 건너는 게 우선인 도로이다. 길을 건너면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소설에나 나오는 '신작로'라 할 길이 펼쳐진다. 차도와 인도가 사이좋게, 이러면 사고 나나. ;; 근데 그 말 말고는 딱히 이 신작로를 표현할 방법이 없다. 차도와 인도가 사이좋은 길.

나름 이 층도 많은데 납작 업드린 건물이 옹기종기란 생각은 왜 드는 것인지. 일천구백칠십 년대로 돌아가는 것 같다.




담날 자동차가 없길래 또 찍었다. 단정히 매달린 셔츠가 '의상실'이라 고백한다.


'주단 한복 각시방, 제일 의상실.'

'각시방', 아마 지금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으리란 확신이 드는 방 이름. '의상실'이란 말은 또 어떠한가. 그건 한두 군데 정도 찾아지려나, 이 대도시에서.

'제일第一'이란 단어를 가게 이름에 사용한 것은 일제 시대의 흔적이 느껴진다. 전통 사회를 허물고 당시의 사회 경제 시스템이란 걸 따라 '표준화'를 시작하니 사람들도 이제 일 개 군중이 된다. '군중'이란 '사회 현상'이 생겼다 할 만한 그 시절 근대에 '무리 속에서 그래도 잘나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된 말이리라. 한때 '제일'이라 뽐내었던 기개가 저 쇼윈도 어딘가에 스며 있을 것 같다. 아니, 아직도 '제일'인 솜씨는 그대로이리라. 우리 집에 수선할 옷이 생기면 저곳에 갖다 맡겨 보고 싶어진다.






이곳은 빈 가게 터다. 아무 영업을 하지 않는다. 내 기억에 삼십 년 전에 저 근처에 돈가스집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당시로서 제일 부티나는 식당이었다. 명멸이란 저런 것일까. 설령 저 안에서 우리가 모르는 어떤 모의가 벌어지고 있다 해도 이름표도 생기도 없는 이들은 실로 머지않은 작별인 건 아닌지.






이쯤 오면 영화 세트장 같다. 신기하다. 고요하다.

'맛나니 정식'에선 소주, 막걸리, 맥주도 마실 수 있다. 과일 가게 '청도 상회'는 오토바이 퀵 서비스를 판 지 오랜 거 같다. '은창 유리 문구'는 모자, 신발, 전기장판, 방충망. 없는 게 없다.

이들 가게는 근대적 분업의 체계가 없다. '옛날'의 경계 없는 넘나듦. 우리 핏속에 녹아있는 아득한 기억, 그것이 소환될 수밖에 없다. 어디 가든 누구가 되었든 '대략 다 해결'해 주던 '옛날'.


저 어느 가게 문을 열고 나와 교복을 입은 그 집 아들이 저기 귀퉁이 자전거에 올라타고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반대편 길에서 여학생이 바라보고 있다는 걸 그는 모른다. 매일 그 시간에 여학생은 이곳을 지나가고 남학생은 페달을 밟는다. 시간이 둘 사이를 잇는다. '나중'이란 때가 되면 그들은 어찌 되었을까나. 이런 상상을 하다보면 직장에 닿는다.






퇴근길.

정다운 신작로 길.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


아;; 을씨년스런 장면. 좀더 가면 예쁜 납닥이들이 또 나온다. 이 동네는 사람 안 사나 하시겠다. 제 말이요, 여전히 세트장 같다니깐요.





납닥이들 출연, '신작로 연탄구이'

어마어마 맛있는 밥집이다. 짐작하시겠지만 연탄구이만 파는 집이 아니다. 없는 게 뭔고?

따시고 흐드러지던 옛날 집밥. 죽음이닷. 요런 납닥이 가게는 출근길엔 안 보인다. 똑 퇴근길에 보이니 참 요상하지. 직장의 하루를 어딘가에 한 잔 털어넣을 수 있는 소주 생각 때문이겠다.




다시 댕댕씨 발자국을 따라 얼굴 모르는 댕댕씨를 그리워하고 '홍해의 갈림길'을 역으로 걷는다. 멀리서 다가오는 도시 전철이 지반을 울리며 존재를 알리면 마지막으로 이 길에 '안녕' 해야 할 시간. 하늘을 본다.


지하철 역사 가는 길 옆, 숲으로 지는 해. 뜨는 별.


참내. ET의 자전거가 날아갈 것 같지 않나. 나는 또 한참 저들을 본다. 배가 고파지니 할 수 없이 간다.

언제까지 이 길을 찍고 말할 지 나도 모르겠다.






출퇴근길 따라 순서대로 만나는 저들과 매일 랑데부를 한다. 아침에는

"반갑다, 오늘도 우린 하은수를 기다리고 있었어."

저녁에는

"수고했어. 내일 또 와줘. 사랑한다구!"

늘상 그리 하더니 지금

"우리를 기록해 줘서 고마워."

하네.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당신들이 더 고마운 줄을 모르고.


사실은 이 길도 맞은 편부터 점차 저와 같은 다정이들은 허물리고 신식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그래서 이들을 만난다는 것이 더 소중하다. 그러고 보니 사랑의 랑데부는 둘이서만 하는 건 아니로구나.


삼십 년 직장 생활 그만둘까 하는 마음을 끄집어 내리는 이유가 자꾸자꾸 생긴다. 매일.






*랑데부(Randez-vous) : 우주선과 인공위성이 우주에서 만나게 되는 일. 비밀스런 만남, 회합의 느낌이 있는 불어식 단어.






ㅡ 새 근무처에 복직하여 한 달 가량 지났을 때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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