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마요르 광장, 솔 광장
마드리드에서의 첫 일정은 세르반테스 동상이 있는 스페인광장이었다.
이 동상은 1916년에 세르반테스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마드리드시에서 정비하는 중인지 동상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철책을 빙 둘러놓았다. 다들 세르반테스보다 말을 타고 창을 든 돈키호테를 더 먼저 알아봤다. 소설 속 주인공이 작가보다 더 유명한 것이다.
우리는 세르반테스와 돈키호테 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며 문학 기행의 첫발을 힘차게 내디뎠다.
<돈키호테>는 성경책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 문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명작으로도 꼽히는 고전 중의 하나고, 첫 근대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 생애의 가장 중요한 이력은 작가가 아닌 군인이다. 그는 22세 때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였다가 전투 중에 가슴과 왼손에 총상을 입었다. 그 후유증으로 평생 왼손을 못 쓰게 되어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8세 때인 1575년에 퇴역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해적의 포로가 되어 알제리로 끌려갔다. 해적이 요구한 막대한 몸값을 마련하지 못해 4번이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수도원에서 몸값을 대신 갚아 준 덕분에 1580년에 마드리드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의 나이 57세 때인 1605년에 <돈키호테> 제1부를 발표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지만, 생활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다. 빚에 쪼들려 저작권을 이미 출판사에 넘겨준 터라 작가는 큰돈을 만질 수가 없었다. 1615년에 <돈키호테> 제2부를 완성했고,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죽은 것이다.
1616년 4월 23일은 당대의 대가 셰익스피어도 세상을 떠난 날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날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그들은 가는 길에 만나 길동무가 되었을까?
나는 여태껏 ‘돈키호테’가 한 단어인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다.
사람 이름 ‘키호테(Quixote)’ 앞에다 존칭이자 우두머리를 뜻하는 스페인어 ‘돈(Don)’을 붙여서 만든 말이다.
‘키호테’라는 말은 허벅지 안쪽을 보호하는 갑옷 부위를 뜻하는 말로 정력을 의미하는 은어다. 그러니 돈키호테는 ‘정력 왕’이라는 뜻이 된다. 주인공 이름부터가 우스꽝스러운 성적(性的) 농담이었다.
평생 모르고 지나갈 뻔한 내용이었는데, 가이드가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었다. 이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고, 여행은 살아있는 교육 현장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마요르 광장(Plaza Mayor)은 축하, 종교의식, 처형 등 다양한 행사를 거행해 온 공간이다. 관광객과 주민이 함께 즐겨 찾는 카페와 술집, 상점이 들어선 4층짜리 건물에 둘러싸인 사각형 광장이다.
이곳에서는 주말마다 야외 골동품 시장이 열리고 매년 마드리드의 수호성인인 성 이시도르 축제도 열린다.
한때 시장터였던 이곳은 16세기에 바로크 양식의 광장으로 탈바꿈했고, 가로 90m에 세로 109m 되는 네모난 공간은 지금 유럽에서 가장 큰 광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광장 중앙에는 펠리페 3세의 청동 기마상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동상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는 30분의 자유시간을 가졌다. 그 짧은 동안에 근처 가게에서 멋진 모자를 사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냥 광장을 배회하며 사진을 찍었다.
나도 멀리 가지 않고 여기저기 유심히 둘러보았다. 호텔과 카페, 아파트 등으로 사용되는 4층짜리 건물에 빙 둘러싸인 광장.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고 아름답다. 바닥엔 돌이 가지런히 깔려 있다. 아직 이른 오전 시간이라 사람도 별로 없고 한적해서 더 여유롭다.
오늘은 이렇게 평온하고 한가한 풍경이지만, 예전에 이곳은 투우와 가면무도회, 왕실 결혼식, 대관식 등의 큰 행사가 거행되었던 사교의 중심지였다.
아빌라의 테레사, 이시도르,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등의 성인이 시성을 받은 장소이기도 했다. 17세기 스페인 종교 재판이 성행했을 때는 이단자 등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던 장소도 바로 여기였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국가의 행사가 모두 이 광장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왜 유럽의 문화를 ‘광장 문화’라고 부르는지 이제야 확실히 알겠다.
우리에게는‘솔 광장’으로 알려진 ‘푸에르타 델 솔’은 영어로 ‘Gate of Sun’ 즉 ‘태양의 문’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곳에는 태양의 모습이 새겨진 성문이 있었다. 16세기까지 있던 그 성문은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태양의 문이라는 이름은 남았다. 이곳은 마드리드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으로 스페인 전역으로 가는 모든 도로의 기점이기도 하다.
시계탑 앞 바닥에는 킬로미터 제로(영점) 표식이 있다. 이 표식을 발로 밟으면 다시 마드리드로 돌아온다는 속설도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우리는 걸음을 멈추었다. 가이드는 저만치 앞서가며 어서 따라오라고 연신 재촉했지만, 이곳에 다시 돌아오고 싶다는 열망이 더 컸다.
다들 발을 올려놓고 얼른 사진만 한 장 찍고는 부리나케 뛰어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