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스케스의 시녀들, 고야의 옷 입고 벗은 마하
프라도 미술관 자리에는 원래 카를 3세가 건축가 빌라누에바를 시켜서 스페인의 ‘자연사 박물관’을 지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건물은 오랫동안 미완성으로 남아있었고, 훗날 페르난도 7세가 건물을 완공하게 되었다.
그는 아내의 조언에 따라 이 건물을 회화와 조각 작품을 전시할 왕립 미술관으로 용도 변경했다. 마침내 1819년 11월에 ‘국립 프라도 미술관(Museo Nacional del Prado)’이라는 이름으로 왕립 회화 조각 미술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프라도 미술관은 세계 3대 미술관으로도 손꼽힌다.
주로 12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의 유럽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미술관의 중심이 되는 컬렉션은 스페인 왕실이 15세기부터 수집한 회화와 조각품이다.
1872년에 문을 닫은 ‘삼위일체 미술관’과 1971년에 문 닫은 ‘현대 미술관’의 작품들이 프라도 미술관으로 이관되는 바람에 더욱 많은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다.
베르메호, 베르데테, 엘 그레코, 무리요, 벨라스케스, 고야, 로페즈, 소로야 등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린 스페인 화가들의 명작은 물론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의 작품들도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한다. 작품을 나라별로 전시하고 있어서 각국의 특성과 역사를 살피며 감상할 수도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관람료를 내고도 공항 출국장 같은 검열대를 또 통과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큰 가방은 입구 보관소에다 맡겨야 하고, 작은 소지품도 일일이 다 검사한 후에 들여보낸다.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어렵게 들어가 보니 어디서 무엇부터 봐야 할지 모르겠다. 전시관이 너무 크고 작품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하지만 우리가 프라도 미술관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두어 시간 남짓이다.
이번엔 그저 수박 겉핥기라도 열심히 하고 가자는 심정으로 가이드 옆에 바짝 붙어 설명을 열심히 들으며 따라다녔다. 주로 엘 그레코와 벨라스케스, 고야의 작품을 찾아 집중적으로 보여주며 빠르게 설명하고 이동했다. 그들이 프라도 미술관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라고 누차 강조하면서 말이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다. 그림 속에 상상을 초월하는 반전 매력이 있다.
시골의 작은 백작 가문에서 유럽 전역을 석권하는 왕조가 된 합스부르크가 의 불행은 엉뚱한 데서 시작되었다.
합스부르크의 영토와 재산을 다른 가문에 넘겨주지 않고, 순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친척 간에 근친혼을 고집했다. 근친혼이 계속되다 보니 합스부르크 후손들은 턱뼈가 비정상적으로 자라는 주걱턱과 상체보다 하체가 지나치게 짧은 난쟁이가 되었다. 유전병이었다.
그림 <시녀들>에 등장하는 금발의 소녀는 펠리페 3세가 마리나 왕비에게서 낳은 공주였다. 근친혼을 한 펠리페 3세는 왕비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금슬이 아주 좋은 부부의 자녀도 유전병은 피하지 못했다.
얼핏 보면 공주와 시녀, 궁녀들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 속 화가가 이젤 앞에서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다. 화가는 지금 관객의 위치에 서 있는 왕과 왕비를 그리는 중이다.
뒷모습만 보이는 이젤에 그린 그림은 바로 뒤편 중앙에 있는 거울에 비친 남녀의 모습이다. 앞에 그려 놓은 난쟁이 공주와 시녀, 궁녀. 강아지는 그저 들러리에 불과하다. 벨라스케스의 반전 그림인 것이다.
실제로 전시장 바닥에 왕과 왕비가 선 자리 표시도 있다. 그 자리에 서면 그림 속에 보이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 거울에 비친다는 말이다.
벨라스케스는 어떻게 이리 기발한 생각을 했을까. 기존의 판을 완전히 뒤집는 그의 창의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많은 고야의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는 <옷 입은 마하>와 <옷 벗은 마하>를 꼽을 수 있다.
1799년부터 궁정화가로 일했던 고야는 당대의 실권자인 마누엘 고도이 총독의 주문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고도이는 정권의 실세인 마리아 루이스 왕비의 정부(情夫)였다. 그 당시 <옷 벗은 마하>는 매우 파격적인 누드 작품이었다.
<옷 벗은 마하>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처럼 뒤돌아 누운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누워 있다. 벨라스케스가 그려 넣어 신화라는 맥락을 만들었던 큐피드조차 없다. 여성의 몸을 노골적으로 다 보여주고 있다. 도발적인 눈빛과 부자연스러운 각진 몸매. 전통에서 벗어난 세속적인 누드였다.
처음 이 그림을 몰수했을 때는 ‘마하’가 아닌 ‘집시’라고 불렀다. 1815년에 종교재판소가 이 그림을 압류했을 때 ‘마하’라는 이름을 붙였다. 고야는 이 그림으로 인해 고초를 많이 겪게 되었는데, 후일에 마누엘 고도이 총독은 <옷 입은 마하>를 하나 더 그려달라고 청했다.
고도이 총독은 옷을 입고 벗은 두 마하를 겹쳐 걸어 놓고 은밀하게 즐겼다.
평소엔 <옷 입은 마하>가 보이게 걸어 두지만 혼자 있을 때는 <옷 벗은 마하>를 보이게 했다. 고도이와 마하 그림 이야기는 흥미로운 전설이 되어 지금도 가이드의 입을 통해 관람객에게 계속 전해지고 있다.
현재 이 두 그림은 프라도 미술관에 나란히 걸려 있다. (계속)